첫 부인 마리야가 죽고 난 후 안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와 마르타 브라운을 상대로 한 재혼 시도에서 잇달아 고배를 맛본 후 도스토옙스키는 또다른 재혼 대상으로 유럽에 있는 수슬로바를 떠올리고는 그녀를 찾아가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면 도스토옙스키가 이처럼 재혼에 매달린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첫 부인 마리야와 유일한 의지처였던 형 미하일을 잇달아 잃은 후의 상실감과 외로움이 너무 컸기 때문일 것이다. 시베리아 옴스크에서 혹독한 유형생할을 마친 후 세미팔라틴스크 군 복무 시절 느꼈던 여성에 대한 사랑의 뜨거운 갈망이 다시 세차게 솟아올랐던 것 같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인근의 도스토옙스키 동상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인근의 도스토옙스키 동상

형 미하일은 마리야가 죽고난 지 석 달 후인 1864년 7월, 며칠 시름시름 앓다가 갑자기 죽었다. 전년도에 강제 폐간된 〈시대〉를 〈세기〉로 이름을 바꿔 복간한 뒤 몇 달 지나지 않아서였다.

백방으로 뛰어다녀 제호를 바꿔 겨우 복간을 했는데, 형 미하일이 갑자기 세상을 뜬 것이다. 형까지 죽고 난 후 도스토옙스키가 얼마나 절망했는가는 그 이듬해인 1865년 3월 31일 그가 브란겔 남작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아내의 장례식을 치르고, 나는 서둘러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형에게로 갔습니다. 남은 것은 형뿐이었으니까요. 석 달이 지나자 형도 이미 이 세상에 없게 되었습니다. 병상에 누운지 겨우 한 달, 그것도 대단한 병이 아니었습니다. ‘이건 좀 위험한데’라고 했던 것이 겨우 삼일, 그 삼일의 고비는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 왔습니다.

덜컥 혼자가 된 것은 갑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두렵다고 생각하면 참을 수 없이 무서워졌습니다. 삶이 두 쪽으로 나뉘어진 것 같았습니다. 한쪽에는 살아 온 과거 전체가, 다른 한쪽에는 죽은 두 사람을 대신할 아무도 없는 미지의 세계로, 말 그대로 나는 살아갈 이유를 잃어버렸습니다.

새로운 관계를 만들 것인가, 새로운 삶을 찾을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매우 소중한 두 사람이었고, 내가 사랑했던 이도 그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새로운 사랑은 필시 앞으로 더 이상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다시 생겨서도 안 된다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간절히 생각했습니다

형이 죽은 후에도 도스토옙스키는 〈세기〉를 어떻게든 혼자 꾸려가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형편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세기〉는 결국 1865년 4월, 1년여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형 대신 갚아야 할 빚이 2만 루블이나 되었다.(*이 돈은 그 후 이자가 붙어 도스토옙스키가 유럽에서 돌아왔을 때는 2만 5천 루블로 늘어났다.) 채권자들은 도스토옙 스키를 채무자 감옥에 집어 넣겠다고 위협했다. 당장 3천 루블가량이 필요했다.

쪼들리던 도스토옙스키는 그때까지 나온 자신의 모든 작품의 판권을 3천 루블에 사줄 잡지사나 출판사를 찾았으나 선뜻 받아들이는 곳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스첼로프스키라는 악명 높은 출판 투기꾼이 그에게 다가왔다. 스첼로프스키는 도스토옙스키의 기존의 모든 작품은 물론 이듬해인 1866년 11월 1일까지 전집에 들어갈 새로운 장편 소설을 한 편 더 쓴다는 전제로 도스토옙스키와 3천 루블에 출판권 계약을 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다른 추가적인 조건이 있었다. 정해진 기일 내에 새 소설을 쓰지 못할 경우 위약금을 물어야 하며, 한 달 후인 그해 12월 1일까지도 완성 못 하면 이미 나온 작품들과 앞으로 나올 도스토옙스키의 모든 작품에 대해서도 스첼로프스키가 독점 출판권을 갖는다는 것이 었다.

자칫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면 평생 노예계약이 될 내용이었다. 그러나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도스토옙스키는 이 같은 위험한 계약서에 1865년 7월 2일 덜렁 서명을 하고 말았다

막대한 빚, 형의 유족과 의붓 아들에 대한 생계 책임 등 복잡한 주변 환경으로부터 일시라도 벗어나고 싶었던 도스토옙스키는 다시 유럽행을 계획한다. 단순한 현실 도피만은 아니었다. 미우면서도 그리운 폴리나 수슬로바를 다시 만나 청혼을 해보리라는 야무진 꿈도 가슴에 품고 있었다.

여행의 또 다른 이유를 댄다면 유럽의 날씨가 간질 발작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것과 한판 도박으로 형세를 만회할 수 있는 일확천금을 움켜 쥘 수 있었으면 하는 희망도 곁들여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오랫동안 도박중독자였다. 도박에 대한 도스토옙스키의 생각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수슬로바와 유럽 여행 중이던 1863 년 9월 8일, 도박장에서 돈을 다 잃고 그는 형 미하일에게 돈을 좀 부쳐 달라고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자신이 도박을 하는 이유는 ‘가족 모두를 돕기 위해서’라고 강변하는 내용이다.

"애인과 함께 여행을 한다고 마지막 한 푼까지 다 쓸 줄은 몰랐다"라고 말했지요. 그런데 형, 나는 비스바덴에서 시스템을 연구해서 그것을 시험해 봤는데, 금세 1만 프랑을 벌은 거예요. 아침이 되어 조금 흥분한 김에 시스템을 벗어났더니, 순식간에 잃어 버렸지요. 저녁에 나는 다시 시스템으로 돌아가서, 그것을 엄수한 덕분에, 점점 승리하기 시작했고, 금세 3천 프랑을 손에 넣었어요.

자, 어떤가요? 이런 경험 뒤에, 맘먹고 시스템에 덤벼들면 분명 기회를 잡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겠어요? 믿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돈이 필요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필요해요. 나를 위해서도 형을 위해서도 제 처를 위해서도 소설을 위해서도. 여기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룰렛으로 1만 플로린이나 따고 있어요.

나는 형과 모두를 도우려고, 형과 함께 뭐든 마무리하고 싶어서 그런 마음으로 여기에 온 것입니다. 괜찮아요. 제 시스템에는 자신이 있습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생활』, 고바야시 히데오, 이은선 번역)

도스토옙스키는 스첼로프스키로부터 받은 3천 루블로 급한 빚 등을 갚고 수중에 남은 175루블을 달랑 들고 유럽으로 출발했다. 이 여행에서 기적의 빛을 만나기를 기대하면서…. <계속>

글 | 이정식 작가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지구과학과)를 졸업하였고, 홍콩대 중국어문과정을 수료했다. ROTC 14기. CBS, KBS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CBS워싱턴 특파원, 정치부장, CBS 사장과 CBS 노컷뉴스 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한국방송협회 부회장, 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 예술의 전당 이사, 뉴스1 사장 및 부회장, 서울문화사 부회장을 지냈다. 언론인이자 작가이며 안중근 의사 홍보대사를 하고 있다.
서울대 언론인 대상(2009)을 수상했으며, 이정식 애창가곡 1, 2, 3, 4집 등의 음반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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