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계집한테는 그냥 채찍밖에 없어요. 안 그러면 그런 인간은 다스릴 방법이 없다고요!” 그(예브게니의 친구인 장교)는 거의 큰 소리로 말했다. (그는 전부터 예브게니의 심복이었던 것 같았다.)

나스타시야는 일순간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녀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녀는 두 발자국가량 떨어져 있는, 전혀 생면부지의 젊은이에게 달려갔다. 그는 손에 가늘게 땋은 채찍을 쥐고 있었다. 나스타시야는 그의 손에서 그 채찍을 낚아채어 그녀를 모욕한 자의 얼굴을 힘껏 내리쳤다. 이 모든 것이 한순간에 벌어졌다.” (『백치』, 540~541쪽.)

성격이야 어떻든 미모의 여성에게 뭇 남성들이 추파를 던지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마찬가지다. 소설 속의 남성 군상들은 모두가 돈을 미끼로 그녀를 유혹한다. 나스타시야에게 오랫동안 집착해 온 젊은 상인 로고진은 마침내 나스타시야에게 결혼 조건으로 거액인 10만 루블을 시작한다.

처음에는 1만 8천 루블로 흥정을 시작했다. 그 뒤 4만 루블로 올렸다가 최종 10만 루블까지 간 것이다.

◇ 소설 속 나스타시야의 운명 

도스토옙스키의 유형 시절 친필 메모 (옴스크박물관)

나스타시야는 소지주의 딸로 7살 때 세습 영지에 난 화재로 어머니를 잃은 데 이어 곧바로 아버지마저 병으로 여의면서 고아가 된다. 부모가 남겨 놓은 재산도 없었고 돌보아 줄 사람도 없었다. 그러던 차에 이웃에 살던 토츠키라는 대지주가 측은한 마음에 나스타시야를 자신의 집사에게 그의 자녀들과 함께 양육하도록 한다.

그런데 몇 년 후 나스타시야가 눈에 띄게 예쁘고 총명하게 성장한 것을 보고는 생각이 달라진다. 여자 가정교사를 붙여 교육을 시킨 다음 나스타시야를 멀리 떨어진 한적한 다른 영지로 옮겨 놓고 일 년에 몇 개월씩 머물렀다. 나스타시야를 정부(情婦)로 만든 것이다.

그러던 중 토츠키가 부유한 상류층의 미인과 결혼한다는 소문이 나돈다. 나스타시야는 느닷없이 시골에서 홀로 페테르부르크로 토츠키를 찾아 간다.

그녀는 자신이 그를 찾아 온 것은 지금의 혼사를 훼방 놓기 위해서라고 선언한다. 나스타시야는 맨 처음 토츠키를 봤을 때부터 그에 대해 심한 경멸과 구역질 날 만큼의 혐오 이외에는 아무런 감정도 가슴속에 품어 본 적이 없다고 밝힌다. 토츠키는 나스타시야의 예상치 않던 방문과 돌변한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약간 겁쟁이였던 토츠키는 나스타시야를 금전적으로 회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의중에만 있던 결혼을 포기한다. 그러고는 방향을 180도 바꿔 나스타시야를 페테르부르크로 이주시켜 아예 상류사회로 진입시킨다. 뭔가 이용 가치가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토츠키는 자신이 나스타시야에게 청혼할 생각도 했으나 그녀가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단념한다. 그러고는 나스타시야를 예판친 장군의 비서인 젊은 가브릴라(가냐)와 결혼하도록 주선해 그녀와의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래서 나스타시야에게 가브릴라와 결혼할 경우 7만 5천 루블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이에 대해 나스타시야는 자신의 영명축일(러시아 정교회에서 세례명을 받은 날) 파티 때 그에 대한 답을 주겠다고 대답한다. 그동안 예판친 장군도 나스타시야에게 흑심을 품고 그녀에게 줄 값비싼 진주목걸이를 부인 몰래 영명축일의 선물로 준비한다. 오랫동안 그녀에게 열렬하게 구애해온 청년 갑부 로고진도 거금 10만 루블을 들고 이 파티에 온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 나스타시야가 영명축일에 오랫동안 자신에게 열렬하게 구애를 해 온 청년 갑부 로고진이 신문지에 싸서 들고 온 거금 10만 루블을 벽난로의 불속에 던져 넣는 장면은 『백치』의 하이라이트다.

손님들은 대부분 나스타시야에게 유혹의 눈길을 보내온 남자들이다. 돈 또는 진주목걸이 등을 그녀에게 미끼로 던졌던 사람들인 것이다. 나스타시야는 이들 앞에서 그 같은 기상천외한 일을 벌인다. 그러고는 구혼자 중 한 사람이며 토츠키가 결혼을 주선하고 있는 가브릴라에게 “당신의 마음을 보고 싶다”며 “벽난로 속에 들어가 돈을 꺼내 가지라”고 말한다.

나스타시야가 돈뭉치를 벽난로에 던져넣고 가브릴라에게 들어가서 꺼내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의벽화 일부 ( 모스크바 도스토옙스키 지하철역 플랫폼)
나스타시야가 돈뭉치를 벽난로에 던져넣고 가브릴라에게 들어가서 꺼내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의벽화 일부 ( 모스크바 도스토옙스키 지하철역 플랫폼)

좋아요. 그럼 가브릴라, 잘 들어봐요. 마지막으로 당신의 마음을 시험해 보고 싶군요. 당신은 3개월 내내 나를 괴롭혀 왔어요. 이제 내 차례예요. 이 보따리가 보이지요? 여기에 10만 루블이 들어있어요! 내가 이걸 모든 사람들이 보는 데서 지금 벽난로의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버리겠어요. 모두가 증인이에요! 이 돈 보따리가 화염에 싸이는 순간 벽난로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나 장갑을 끼면 안 돼요. 맨손이어야 해요. 소매를 걷고 불속에서 돈뭉치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손가락에 화상을 좀 입는 대신 10만 루블을 얻을 수 있는 기회니 잘 생각해 봐요!(『백치』, 269쪽)

“모두들 물러나세요! 가브릴라, 뭘 그렇게 서 있는 거예요? 창피해하지 말고, 기어 들어가요! 당신의 행복이 저기 있어요.”

(…)

“이봐요, 돈이 다 타버려요. 모두 당신을 비웃을 거예요.” 나스타시야가 그에게 소리쳤다. “나중에 억울해서 목매달아 죽겠죠. 난 농담하는 게 아니에요.”

사위어 가는 두 개의 장작개비 사이에서 피어 올랐던 불꽃이 나스타시야가 던진 돈다발에 눌려 맨 처음에는 꺼져 가는 듯했다. 그러나 아래쪽에 깔린 장작개비 한 귀퉁이에서 파란 불길이 조그맣게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침내는 가늘고 긴 불길이 돈다발을 핥으며 찰싹 달라붙더니 종이 다발의 네 귀퉁이 위로 확 퍼져서 갑자기 벽난로 속을 환하게 밝혔다, 불길이 위쪽을 향해 넘실거렸다. 모두들 안타까워 어쩔 줄 모르는 신음을 내뱉었다. (『백치』, 271~272쪽)

불길을 바라보던 가브릴라는 끝내 자존심을 지키다가 기절하고 만다. 소설 속에서 가브릴라는 돈에 대해서는 지극히 치사하고 비굴한 인물로 그려져있다. 그럼에도 그는 고문을 참아내듯 벽난로 속으로 기어들어가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처럼 자존심을 지킨 데 대한 보상으로 나스타시야는 부젓가락으로 벽난로 속의 돈을 꺼내 그에게 준다. 돈은 신문지로 둘둘 싸인 채 던져져 다행히도 천 루불 정도밖에는 타지 않았다.

나스타시야는 이날 돈을 들고 온 로고진의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하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고 도망다니다가 점잖은 미쉬낀 공작과 결혼하기로 한다. 미쉬낀 공작은 지나치게 순박하여 백치로 불렸지만, 실은 유로지비(*백치성자[白癡聖者]: 러시아인 가운데 있다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나 강자의 지혜를 꺾는 단순한 사람. 백치이면서 예언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믿어졌다.)로 여겨지기도 한다.

미쉬낀 공작은 불행한 운명의 나스타시야에게 연민과 사랑을 느끼며 정신적으로 불행한 그녀를 자신이 결혼을 통해 구해내야 한다고 생각해 그녀에게 청혼했고 나스타시야도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막상 미쉬낀 공작과의 결혼식 날, 나스타시야는 결혼식장인 교회당 앞에서 자신을 죽자사자 쫓아다니며 결혼을 강요하던 10만 루블의 제공자 로고진을 발견하고는 별안간 태도를 바꿔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로 그와 함께 달아난다. (미쉬낀 공작이 말하는 사랑은 연민일 뿐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갑자기 깨달았다면서….)

영화에서는 간혹 보는 장면이지만, 결혼식장에서 줄행랑을 친 신부 이야기가 한 세기 반 전 그 당시 러시아에서도 더러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도스토옙스키가 창작해 낸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로고진을 따라 갔던 그녀는 결국 로고진의 집에서 그에 의해 살해당하고 만다. 잠든 사이에 칼에 찔려 조용히….

로고진은 그를 찾아 온 미쉬낀 공작에게 그가 나스타시야를 살해했음을 고백하며 “난 누구에게도 저 여자를 내주기 않기로 결심했네”라고 말한다. 로고진은 공작에게 살해 장면을 이렇게 설명한다.

“오늘 새벽 잠가 놓은 서랍에서 칼을 꺼냈지. 사건이 새벽 3시에서 4시 사이에 벌어졌으니까. 칼은 책갈피 속에 끼워져 있었고 …… 그런데 신기하게도 칼이 왼쪽 젖가슴 아래로 7센티미터 …… 아니 9센티미터 가량이나 들어갔는데도 피는 기껏 반 숟가락 정도만 옷으로 흘러내린 거야 그 이상 흐르지 않았다고 …… ”

작가가 앞서 『도박꾼』에서 폴리나에게 꽂아 넣고 싶어 했던 칼이 마침내 나스타시야에게 꽂힌 것 같이 보인다. 폴리나와 나스타시야 둘 다 도스토옙스키가 만들어 낸 수슬로바의 분신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애증의 대상이었던 수슬로바에게 가졌을 것 같은 감정의 일단이 소설을 통해 느껴진다.

소설 『백치』는 엽기적 사랑의 비참한 종말을 보여준다. 더구나 연적이었던 두 남자가 그 여성의 시체 곁에서 함께 밤을 지새우는 장면은 아무리 소설이라 할지라도 상상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살인자 로고진은 뇌염을 앓았다는 정상이 참작되어 15년의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진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

미모를 무기로 남자를 자기 손아귀에 넣어 쥐고 흔들려는 여주인공은 도스토옙스키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한다. 1871년에 낸 『영원한 남편』에서도 주인공은 남성편력이 심했던 여주인공에 대해 이렇게 술회한다.

그 여인에게는 무엇인가 아주 특별한 것, 남자를 끌어당겨 노예로 만들고 그 위에 군림하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계속>

글 | 이정식 작가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지구과학과)를 졸업하였고, 홍콩대 중국어문과정을 수료했다. ROTC 14기. CBS, KBS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CBS워싱턴 특파원, 정치부장, CBS 사장과 CBS 노컷뉴스 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한국방송협회 부회장, 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 예술의 전당 이사, 뉴스1 사장 및 부회장, 서울문화사 부회장을 지냈다. 언론인이자 작가이며 안중근 의사 홍보대사를 하고 있다.
서울대 언론인 대상(2009)을 수상했으며, 이정식 애창가곡 1, 2, 3, 4집 등의 음반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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