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야와 형 미하일이 잇달아 죽은 1864년은 도스토옙스키에게 매우 힘든 한 해였다. 도스토옙스키는 1864년 후반부터 다음 해 초에 걸쳐 두 사람의 여성을 상대로 재혼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두 여성의 이름은 안나 바실리예브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와 마르타 브라운이다. 그 중 안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는 두 번째 부인이 된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의 회고록에도 자세히 기록될 만큼 도스토옙스키와 우정의 관계를 오래 유지한 특이한 케이스다.

안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는 도스토옙스키가 운영하던 〈세기〉 잡지에 원고를 보냈던 문학소녀였다. 단편소설이었다고 하는데 이 원고가 채택되고 원고료가 그녀의 집으로 배달되면서 부모가 이를 딸의 탈선으로 오해해 한동안 난리가 났었다고 한다. 얼마 후 이해가 되었지만…. 아무튼 그러한 인연으로 도스토옙스키는 안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를 알게 되었고 청혼까지 하기에 이른다.

도스토옙스키의 두 번째 부인 안나 그리고리예브나(*혼동을 피하기 위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를 이 챕터에서는 이후 ‘안나 부인’으로 부른다)는 그녀의 회상기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에 수슬로바의 이름은 한 번도 직접 거명하지 않았다.

도스토옙스키가 재혼 상대로 생각했던안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
도스토옙스키가 재혼 상대로 생각했던안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

도스토옙스키가 폴리나에 대해 어떻게 설명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안나 부인은 폴리나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안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에 대해서는 비교적 호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녀의 회상기 속에 몇 차례 언급하고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안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에 대해 안나 부인이 속기사로 자기 집에 드나들 때부터 자세히 이야기를 해주었다.

안나 부인은 회상기에서 “언젠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도스토옙스키)는 안나 바실리예브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에게 청혼했던 이야기를 상세히 해주었다.

"이 똑똑하고 착한, 재주 많은 아가씨의 승낙을 얻고 얼마나 기뻤던지, 하지만 상반된 신념 때문에 그들이 함께하는 행복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한 후 그녀와의 약혼을 파기했을 때는 얼마나 우울했던지를 그는 내게 다 말해 주었다”라고 썼다.

도스토옙스키가 그녀와 실제로 약혼을 했다거나 신념의 차이로 약혼을 파기했다는 증거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훗날 러시아의 저명한 수학자가 된 그녀의 여동생 소피야 코발레프스카야는 “도스토옙스키가 언니에게 청혼했지만 거절당했다”는 기록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한 것은 당시 14세였던 자신이었다고 밝혔다.

안나 부인은 도스토옙스키와 결혼한 지 6년 후에 안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를 대면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이후 친하게 지냈다. 안나 부인은 안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가 탁월한 지성과 착한 심성, 높은 도덕성의 소유자라고 한 도스토옙스키의 말은 정당했다고 회고록에 적었다.

도스토옙스키가 그녀에게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 이야기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기 때문이다.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살면서 내가 만난 훌륭한 여성들 중 하나지. 그녀는 굉장히 똑똑하고 훌륭한 심성을 지녔고, 높은 도덕성을 갖춘 아가씨였지. 하지만그녀의 신념은 나와는 정반대였고, 그녀는 그것을 버릴 수가 없었소. 게다가 지나치게 직선적이었거든. 이 때문에 우리의 결혼은 도저히 행복할 수가 없었던 거요. 나는 그녀에게 했던 약속을 거두었고, 그녀가 사상이 같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소!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 최호정 옮김, 그린비, 2003.)

안나 부인은, 두 사람이 결혼을 했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었으리라는 도스토옙스키의 믿음 또한 정당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안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의 다른 사진

안나 부인은 회상기에서 “안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에게는 양보라는 것이 없었다. 한데 좋은 부부관계에서, 특히 표도르 미하일로비치처럼 지병으로 인해 병약하고 쉽게 흥분하는 사람과의 결혼생활에서는 더욱 필요한 것이 양보다. 게다가 당시 그녀는 정치 투쟁에 너무도 몰입해 있어서 가족에게 많은 관심을 나눠주기가 어려웠다. 해가 지나면서 그녀도 변해갔다. 그래서 나는 훌륭한 아내이자 상냥한 어머니였던 그녀를 기억한다.”라고 썼다.

그러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의 운명은 비참하게 마감되었다고 안나 부인은 말했다. 안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는 도스토옙스키와 헤어진 후 바로 해외로 떠났고 그곳에서 자신과 같은 정치적 신념을 가진 프랑스인 자끌라르를 만났다.

자끌라르는 파리 코뮌(*1871년 프랑스 파리에 민중들이 처음 세운 사회주의 자치정부) 시기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수감됐다가 장인의 도움으로 도주하여 가족들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살았으나 상속받은 많은 돈을 어딘가에 투자했다가 날리면서 파산 상태가 되었다.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는 이에 충격을 받아 앓아눕게 되었고, 귀국 허가를 받게된 자끌라르가 그녀를 파리로 데려갔으나 파리에서 1887년 세상을 떠났다.

이것이 도스토옙스키의 두 번째 애인 안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에 대한 이야기다. 안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 역시 도스토옙스키 소설 『백치』에 등장하는 예판친 장군의 딸 아글라야의 원형으로 분석된다.

소설 속에서 아글라야는 나스타시야 못지않은 미모에 자존심이 강하고 성격이 급한 여성으로 등장한다. <계속>

글 | 이정식 작가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지구과학과)를 졸업하였고, 홍콩대 중국어문과정을 수료했다. ROTC 14기. CBS, KBS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CBS워싱턴 특파원, 정치부장, CBS 사장과 CBS 노컷뉴스 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한국방송협회 부회장, 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 예술의 전당 이사, 뉴스1 사장 및 부회장, 서울문화사 부회장을 지냈다. 언론인이자 작가이며 안중근 의사 홍보대사를 하고 있다.
서울대 언론인 대상(2009)을 수상했으며, 이정식 애창가곡 1, 2, 3, 4집 등의 음반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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