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이었을 첫 번째 전시실에는 초입에 있는 마리야의 전신 그림과 함께 도스토옙스키의 대형 얼굴 그림, 도스토옙스키가 브란겔 남작에게 쓴 편지의 사본, 도스토옙스키의 고난을 상징하는 사형장에서 입었던 흰색 수의를 다소 추상적으로 나타낸 모형물 등이 있었다. 또 둥근 탁자 앞에 앉아 도스토옙스키의 편지를 읽고 있는 모습의 마리야의 디오라마(박물관의 입체 모형)가 창문 옆에 있다.

두 번째 방은 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아에서 쓴 작품인 『아저씨의 꿈』에 나오는 여주인공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모스깔료바의 살롱을 소설에서 묘사된 것처럼 소파, 거울, 시계, 사모바르(*러시아의 전통적인 끓는 물 주전자) 등으로 꾸며놓았다.

도스토옙스키의 편지를 읽고 있는 마리야(왼쪽) 인형과 도스토옙스키 초상화
도스토옙스키의 편지를 읽고 있는 마리야(왼쪽) 인형과 도스토옙스키 초상화

작은 도시 모르다소프시의 오지랖 넓고 단수 높은 소설 속의 여인 모스깔료바는 아름다운 딸 지나를 죽을 날이 멀지 않은 돈 많은 늙은 공작에게 시집 보내 부유한 귀족 미망인을 만들려고 계략을 꾸민다. 이 계략은 결국 실패를 하고 말지만 여인의 악착같은 근성은 마침내 딸을 어느 도시의 시장 부인으로 만들고야 만다.

도스토옙스키는 시베리아에서 이전에 어떤 문학인도 겪지 못한 엄청난 고난을 겪었지만 유형소에서 출소 후 군인으로 살던 기간의 문학적 축적은 별로 크지 않다.

 시베리아에서의 마지막 해인 1859년 『아저씨의 꿈』과 『스테판치코보 마을 사람들』 등 겨우 두 편을 발표했을 뿐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저작에 대한 출판금지가 풀린 것은 1857년이었다. 그해에 세습귀족의 자격도 돌려받았다. 『죽음의 집의 기록』은 시베리아에서 상당 부분을 써놓았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돌아와서 완성했다.

술주정꾼이었던 남편 이사예프와 젊은 교사 베르구노프의 부조 『아저씨의 꿈』을 토대로 미니 살롱으로 꾸민 두 번째 방과 마리야 가족이 살던 세 번째 방 사이에는 작은 복도가 있다. 그 한쪽 면에는 두 개의 커다란 정교회 성당이 들어 있는 당시 쿠즈네츠크시의 그림이 걸려있는데 두 성당 중 한 곳이 도스토옙스키가 마리야와 결혼식을 올린 아름다운 오디기트레옙스크 성당이다.

복도의 다른 두 벽면에는 마리야가 쿠즈네츠크에서 살 때 결혼까지 생각했던 도스토옙스키의 경쟁자였던 젊은 교사 베르구노프와 마리야의 남편 이사예프의 부조가 붙어있다. 해설사 카테리나 양은 이사예프가 『죄와 벌』의 술주정꾼 마르멜라도프의 모델이라고 설명했다.

『죄와 벌』의 술주정꾼 마르멜라도프의 모델이 된 마리야의 전 남편 이사예프의 부조
『죄와 벌』의 술주정꾼 마르멜라도프의 모델이 된 마리야의 전 남편 이사예프의 부조

소설에 나오는 마르멜라도프의 부인 카테리나의 모델은 이사예바라고 분석된다. 소설에서 카테리나는 마리야처럼 폐병 환자다. 남편은 술주정뱅이고 아내는 폐결핵 환자니 영락없이 이사예프 부부다. 소설 속의 카테리나는 알콜 중독자 남편 때문에 가난하게 살지만, 귀족 여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자존심이 강한 캐릭터로 묘사되고 있다.

『죄와 벌』 속에서 마르멜라도프는 술집에서 만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자기의 아내 카테리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짐승 같은 놈이지만, 내 아내인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는 영관(領官)의 딸로 태어난 교양 있는 여자입니다. 나는 하찮은 쓰레기라 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집사람은 숭고한 정신과 고상한 감정을 지니고 있는 교육받은 여자입니다. (…)

그 여잔 어려서부터 깨끗하게 자랐기 때문에 밤낮 빨래를 하거나 걸레질을 하거나 애들 뒤치다꺼리를 해주거든요. 그대로 버려두는 성미가 아닌걸요! 게다가 가슴을 앓고 있어 가끔 피를 토하곤 합니다. (…) 우리 집사람은 유서 깊은 귀족 여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졸업식 때는 현지사와 내빈들 앞에서 무용으로 금메달과 상장까지 받았답니다. (…) 그렇지만 여편네는 성미가 급하고 오만하여 남에게 굽히기 싫어하는 여자입니다. 비록 자기가 직접 마루를 닦고 검은 빵을 씹을지라도 남이 업신여기는 건 절대로 용납하지 않습니다.” (『죄와 벌』, 채수동 옮김, 동서문화사, 2015.)

마리야 가족이 살던 방의 마네킹(왼쪽 여인이 나스타시야, 오른쪽이 카테리나)
마리야 가족이 살던 방의 마네킹(왼쪽 여인이 나스타시야, 오른쪽이 카테리나)

마리야 식구가 살았던 세 번째 방에는 커다란 거울이 있는 화장대 양쪽으로 두 여인의 마네킹이 서있다. 한 사람은 『죄와 벌』의 술주정꾼 마르멜라도프의 아내 카테리나이고 다른 하나는 『백치』의 여주인공 나스타시야라고 했다. 마리야가 두 인물의 모델이라는 의미였다.

『백치』의 나스타시야는 대체로 강한 성격을 가졌던 도스토옙스키의 젊은 애인 수슬로바가 모델이라고 흔히 알려져 있는데 여기서는 그렇게 설명을 했다. 마리야도 만만치 않았다는 얘기다.

마르멜라도프가 소설 속에서 설명하는 아내 카테리나의 성격이 마리야의 그것이라면 도스토옙스키의 애인이었던 수슬로바의 그것과도 비슷한 부분이 있을 것 같다. 하긴 소설 속 인물의 캐릭터가 전적으로 어느 한 사람의 그것만을 표현한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백치』 속 여주인공 나스타시야는 어떤 캐릭터인가? 화재로 부모를 잃은 어린 나스타시야를 데려다 키운 지주 토츠키는 미모의 여인으로 성장한 나스타시야를 정부로 만들었다가 큰코 다치는데, 그는 소설 속에서 나스타시야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 여자는 엄포를 놓으면 그걸 직접 실행에 옮기는 여장부였으며, 특히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그 무엇도 존중하지 않는 성미였기 때문에, 그녀를 금전으로 회유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녀가 이렇게 된 이면에는 무언가 다른 것이 숨어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것은 마음속에 응어리진 울화 같은 것으로,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누군가에 대해 느끼는 연애 소설 같은 분노와 완전히 상궤를 벗어난 지독한 경멸감과 같은 것이었다. (…)

그는 그녀를 4년 동안이나 보아 왔으나 그녀의 참된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내면적으로 갑작스레 대변혁이 일어났다는 사실도 많은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도 과거 어느 한순간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따금 이상한 생각이 떠오른곤 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그 눈 속에 깊고 신비로운 암흑이 예견되었던 듯싶었다. 그녀의 눈빛은 수수께끼를 던져주는 것 같았다. (『백치』, 김근식 옮김, 열린책들, 2016.)

도스토옙스키에게 마리야에서부터 수슬로바로 이어지는 사랑의 번뇌, 고통, 유희, 증오는 어찌되었건 그에게는 귀중한 경험적 자산이 됐음이 틀림없다.<계속>

글 | 이정식 작가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지구과학과)를 졸업하였고, 홍콩대 중국어문과정을 수료했다. ROTC 14기. CBS, KBS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CBS워싱턴 특파원, 정치부장, CBS 사장과 CBS 노컷뉴스 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한국방송협회 부회장, 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 예술의 전당 이사, 뉴스1 사장 및 부회장, 서울문화사 부회장을 지냈다. 언론인이자 작가이며 안중근 의사 홍보대사를 하고 있다.
서울대 언론인 대상(2009)을 수상했으며, 이정식 애창가곡 1, 2, 3, 4집 등의 음반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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