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는 1866년에 쓴 소설 『도박꾼』에서 폴리나를 여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여주인공 이름은 폴리나 알렉산드로브나. 허구적인 소설이지만 소설 속 여주인공 폴리나의 성격은 바로 폴리나 수슬로바다. 이름을 그대로 따왔다.

수슬로바
수슬로바

『도박꾼』의 주인공이자 도박꾼 알렉세이 이바노비치가 사랑하는 대상인 폴리나는 속을 알 수 없는 도도하고 변덕스러운 미녀다. 그녀는 자기를 좋아하는 주인공 알렉세이에게 돈을 주면서 룰렛 도박을 해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따서 자기에게 달라고 시킨다.

소설 속의 폴리나는 알렉세이를 사랑하면서도 경멸한다. 알렉세이 또한 폴리나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증오 한다. 서로가 비슷하다. 그런 것도 사랑이라고 하는 건지….

도스토옙스키와 폴리나 두 사람이 가졌던 감정이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파리에서 도스토옙스키를 기다리던 사이에 다른 남자와 놀아났던 폴리나와 떠난 여행이었으니까. 이해하는 척했던 도스토옙스키도 속으로는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을 것이다.

소설 『도박꾼』에서 알렉세이는 폴리나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면서도 그녀의 가슴에 날카로운 칼을 서서히 꽂아 넣고 싶다는 이중적인 감정을 보인다.

(폴리나로부터) 룰렛 도박장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고 나니 나는 마치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상한 일이다. 나는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려고 했지만, 어느 틈엔가 폴리나에 대한 내 감정의 느낌들을 분석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비록 여행 중에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우수에 잠기고, 가스에 중독된 사람처럼 몸부림치고, 또 꿈에서마저 쉴 새 없이 그녀를 보긴 했지만, 그래도 이곳을 떠나있던 두 주일 동안 나는 오늘 하루보다, 그러니까 이곳에 돌아온 후의 하루 동안보다 더 마음 편하게 지냈던 것이 사실이다. (…)

이제 나는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역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니 차라리 그녀를 미워한다고 대답하는 편이 낫겠다. 그렇다. 난 그녀가 혐오스러웠다. 그녀를 목졸라 죽이기 위해 반생(半生)을 바칠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녀와 얘기를 끝낼 때만 되면 언제나 그랬다.

맹세컨대, 만일 그녀 가슴에 날카로운 칼을 서서히 꽂아 넣을 수만 있다면, 나는 아마도 기쁜 마음으로 그 칼을 손에 움켜쥘 것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성스러운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하건대, 만일 그녀가 슐란겐베르크의 유명한 봉우리에서 정말로 내게 〈밑으로 떨어져요〉라고 말했다면 나는 당장에 몸을 던졌을 것이다.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어떤 식이라도 상관없지만 그 문제는 꼭 해결되어야만 했다. 그녀도 이 모든 사정을 놀라우리만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확신하건대, 결코 내가 그녀를 차지할 수 없다는 사실과 내 공상들을 절대 실현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내 자신이 아주 확실하고 분명하게 깨닫고 있다는 생각, 바로 그 생각이 그녀에게 대단한 쾌감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신중하고 영리한 그녀가 그렇게 솔직하고 허물없이 나를 대할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그녀는 자신이 마치 고대의 여왕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를 보아온 것 같다. 여왕은 자신의 노예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보는 앞에서 옷을 벗어 젖혔다. 그렇다. 그녀는 몇 번씩이나 나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노름꾼』, 도스토옙스키, 이재필 옮김, 열린 책들, 2014.)

『도박꾼』을 쓴 2년 후인 1868년 도스토옙스키가 두번째 부인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와 유럽 체류 중에 쓴 『백치』에서는 뛰어난 미모에 종잡을 수 없이 변덕스러운 성격의 나스타시야 필리포브나가 여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나스타시야의 모델 또한 수슬로바라는 데는 도스토옙스키 분석가들 사이에 별 이의가 없다.

백치에서는 나스타시야의 미모에 대한 묘사가 거듭 나온다,

“이분이 나스타시야 필리포브나인가요?” 그(미쉬낀 공작)는 사진을 호기심에 차서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놀랄 만한 미인이군요!” 그는 격앙된 목소리로 덧붙였다. 사진 속에는 정말로 보기 드문 미인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극히 소박하고 우아한 패션의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짙은 아맛빛으로 보이는 머리는 집 안에 있을 때처럼 수수하게 빗겨져 있고, 두 눈은 깊고 까맸으며, 이마는 사색에 잠겨 있는 듯했다. 열정적인 얼굴 표정은 오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얼굴은 여윈 편이었으며 창백한 기가 있었다……. (『백치』, 53쪽, 김근식 옮김, 열린책들, 2016.)

“이 여자가 마음에 듭니까, (미쉬낀) 공작?”

그(가브릴라, 예판친 장군의 비서)는 불쑥 이런 질문을 하며 공작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 말 속에는 심상치 않은 의도가 숨어있는 것 같았다.

“기가 막힌 미모군요!” 공작이 대답했다.

“이 여자의 운명이 평탄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얼굴은 명랑한데, 매우 고생을 했던 것 같지 않아요? 두 눈이 그렇게 말해 주고 있어요. 여기 눈 아래의 뺨에 있는 광대뼈만 보아도 그래요. 자존심이 강해 보이는 얼굴이에요. 아주 자존심이 강해 보여요. 선한 여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어요. 선하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렇다면 모든 게 잘될 텐데요!” (『백치』, 61~62쪽)

수슬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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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드문 미모와 다른 무엇으로 인해 그녀의 얼굴은 한층 더 강한 힘으로 그를 놀라게 했다. 그 얼굴에는 거만한 기품과 거의 증오에 가까운 경멸의 빛이 서려 있는 동시에, 남을 쉽게 믿을 듯한, 놀랄 정도의 순박한 무언가가 배어 있었다.

이 대조적인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연민의 정까지 불러일으키게 했다. 그 현란한 아름다움은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창백한 얼굴, 푹 파인 듯한 두 뺨, 불타는 눈동자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움은 특별한 아름다움이었다.

공작은 1분 동안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정신이 드는 듯 주위를 둘러보고는 사진을 황급히 입술에 대고 키스했다. (『백치』, 128쪽.)

“저런 미모는 힘이야!” (예판친 장군의 딸)아젤라이다가 열띤 소리로 말했다. “저런 미모라면 이 세상을 전복시킬 수 있어!” (『백치』,130쪽)

동양식으로 말하면 경국지색(傾國之色: 군주가 혹하여 나라가 기울어져도 모를 정도의 미인이라는 뜻)이란 얘기다.

소설 속의 나스타시야는 인물은 빼어나지만, ‘지독하게 신경질을 잘 내고, 의심을 잘 하는 데다 자존심이 강한’ 여자다.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그 무엇도 존중하지 않는 성미다.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로 나온다. <계속>

글 | 이정식 작가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지구과학과)를 졸업하였고, 홍콩대 중국어문과정을 수료했다. ROTC 14기. CBS, KBS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CBS워싱턴 특파원, 정치부장, CBS 사장과 CBS 노컷뉴스 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한국방송협회 부회장, 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 예술의 전당 이사, 뉴스1 사장 및 부회장, 서울문화사 부회장을 지냈다. 언론인이자 작가이며 안중근 의사 홍보대사를 하고 있다.
서울대 언론인 대상(2009)을 수상했으며, 이정식 애창가곡 1, 2, 3, 4집 등의 음반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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