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소설의 원고를 보내기로 약속한 날이 다가오자 도스토옙스키의 마음 한 켠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슬며시 고개를 쳐들었다. 스첼로프스키가 위약금을 뜯어내기 위해 무슨 핑계를 대면서 원고의 수령을 거부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안나는 그가 걱정하는 이야기를 듣고 집에 돌아와 그녀의 어머니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아는 변호사에게 그럴 경우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물어봐 달라고 부탁했다.

안나의 어머니가 아는 그 변호사는 원고를 공증인에게 넘기든지, 아니면 스첼로프스키가 사는 지역의 경찰서장 등에게 맡기고 그의 인수증을 받아놓으라고 조언했다.

도스토옙스키도 나름대로 그의 초등학교 동창생의 형인 세계적인 판사 프레이만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그도 똑같은 조언을 해주었다.

마침내 약속한 날이 다가왔다. 우려했던 대로 스첼로프스키는 술수를 썼다. 이 교활한 자는 그날 원고를 받지 않기위해 자리를 피했다. 날짜를 넘기도록 하기 위한 얄팍한 술책이었다.

도스토옙스키가 그의 집으로 원고를 주러 갔을 때 하인은 그가 지방으로 떠났으며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고 말했다. 도스토옙스키는 그의 출판사 사무실로 찾아가 원고를 사무실 책임자에게 주려했지만, 그는 그에 관해 사장으로부터 위임 받은 바가 없다면서 접수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러는 사이 공증인에게 갈 시간도 놓치고 말았다. 온종일 불안감에 휩싸여있던 도스토옙스키는 결국 밤 10시가 되어서야 원고를 스첼로프스키가 살던 N지구의 경찰서에 맡기고 인수증을 받을 수 있었다.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것이다.

출판업자 스첼로프스키는 당시 문인들과 음악가들이 곤경에 처할 때를 기다렸다가 이들의 작품들을 후려쳐 헐값에 사들이는 방법으로 이득을 취해온 악랄한 자였다.

◇ 『죄와 벌』에 나오는 K다리와 운하
◇ 『죄와 벌』에 나오는 K다리와 운하

도스토옙스키는 그가 1865년 저작권료로 받은 3천 루블도 대부분 스첼로프스키의 수중으로 되돌아갔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수법은 이러했다.

스첼로프스키는 당시 도스토옙스키의 채권자들로부터 그의 어음을 헐값에 매입한 후 앞잡이를 두 사람 내세워 도스토옙스키에게 ‘채무자 감옥으로 보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빚 독촉을 하도록 했다.

그러고는 궁지에 몰린 도스토옙스키에게 접근해 3천 루블의 저작출판권 계약을 체결하고 돈을 공증인에게 맡겼다. 공증인은 그 돈을 다음 날 도스토옙스키의 채권자들에게 대부분 지불했는데, 그 채권자들이란 다름아닌 스첼로프스키가 매수한 유령 채권자였던 것이다.

결국 돈은 다시 스첼로프스키에게 회수된 셈이다. 싼 값에 사들인 어음을 도스토옙스키에게 액면가로 받아 이익을 챙긴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도박꾼』의 구술을 다 마친 다음 날인 1866년 10월 30일, 안나에게 약속한 50루블을 주면서 그녀의 손을 꽉잡고 “도와줘서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했다. 이날은 도스토옙스키의 생일이었다.(*제정 러시아에서 사용하던 율리우스력의 날짜, 현재의 그레고리력으로는 11월 11일)

11월 1일 『도박꾼』의 원고를 무사히 넘긴 후 도스토옙스키는 안나에게 〈러시아 통보〉에 연재하고 있던 『죄와 벌』의 마지막 부분의 집필을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당신과 작업하는 게 너무 수월했소. 앞으로도 일을 속기로 하고 싶은데, 내 동료가 되는 걸 거부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안나는 기꺼이 돕겠다고 답했다. 『죄와 벌』 속기 작업의 계약을 하러 간 11월 8일 도스토옙스키는 왠지 들떠있었다. 그는 안나를 보자 거의 감격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날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새 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젊은 여성의 심리를 알아야 결말을 맺을 수 있는데, 모스크바에 있을 때라면 조카딸 소냐에게 물어보겠지만, 지금은 안나에게 도움을 구해야겠다고 했다.

새 소설의 주인공은 나이가 도스토옙스키와 비슷한(45세쯤 되는) 화가다. 이 화가는 어린 시절, 사랑하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그 후 중병이 들어 10년 동안이나 예술에서 떠나있어야 했다. 병이 들어 있는 동안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던 것은 물론이다.

그러다가 다행히도 10년 만에 병을 고치고 다시 사회로 나왔다. 사회에 나와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했으나 그녀가 죽어 화가는 홀아비가 되었다. 또 자신과 가까운 누이들도 세상을 떴으며, 경제적으로는 가난과 빚에 짓눌리는 상태가 되었다. (안나가 듣다 보니 도스토옙스키 자신의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화가는 어느 날 화가들 모임에서 아냐(안나의 애칭)라는 젊은 여성을 만 났는데, 볼수록 점점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여자 주인공 아냐가 안나보다 두 살쯤 많은 나이 즉 22살쯤 된다고 했다.

이 아냐라는 여자에 대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는 자신이 안나라는 생각을 까맣게 잊고 그 여주인공의 모델이 도스토옙스키가 언젠가 결혼할 생각을 했었다고 이야기한 젊은 작가 지망생 안나 바실리예브나 고르빈-크루코프 스카야라고 추측했다.

화가는 그녀와 함께라면 행복을 꿈꿀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녀에게 청혼하고 싶었지만 그런 꿈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젊은 아냐가 그처럼 나이 많고, 병들고 빚에 시달리고 있는 화가를 사랑할 수 있을지, 그런 지독한 희생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등이 도스토옙스키가 안나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작가로서 젊은 여성의 심리를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

안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게 왜 불가능하죠? 당신이 말한 것처럼, 정말 당신의 아냐가 머리는 텅 비고 치장만 요란한 여자가 아니라 인정이 있고 착한 마음을 지녔다면, 당신의 화가를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그가 병들고 가난하니까? 외적인 것, 뭐 부귀라든가 하는 것만으로 사랑할 수가 있는 건가요? 그리고 뭐가 그녀의 입장에서 희생이라는 거죠? 그녀가 그를 사랑한다면, 스스로도 행복할 것이고 결코 후회할 리가 없을 거예요!” 안나는 열변을 토했다.

도스토옙스키는 흥분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 보았다. “그러니까 당신은 그녀가 그를 평생토록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진짜 믿는단 말이오?” “그 화가가 나라고 상상해 보오. 내가 당신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내 아내가 되어달라고 부탁한다고 상상해 보오. 당신은 내게 뭐라고 답하겠소?”

안나는 그제서야 이것이 단순히 작품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이렇게 말했다. “나라면 당신에게, 당신을 사랑하고 일생을 다해 사랑할 거라고 답할 거예요!” 위의 이야기는 앞에서도 인용했던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의 회고록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한 나날들』에 나오는 이야기를 요약한 것이다.

◇ 『죄와 벌』에 나오는 19세기 센나야 광장의 모습(그림)
◇ 『죄와 벌』에 나오는 19세기 센나야 광장의 모습(그림)

도스토옙스키의 청혼과 안나의 수락은 이렇게 소설처럼 이뤄졌다. 안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청혼을 받고 “어마어마한 행복에 감격하여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전날 밤 꿈 속에서 나무서류상자 속에서 밝게 빛나는 작은 다이아몬드를 발견한 이야기도 이날 안나에게 해주었다. 그 나무상자는 카자흐 학자 초간 발리하노프가 도스토옙스키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발리하노프는 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아 옴스크에서 유형 생활을 마친 직후 알게 된 카자흐 유력 가문의 젊은 학자로 세메이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에 두 사람이 같이 앉아있는 동상이 있다는 이야기를 앞에 서 한 바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안나에게 청혼한 후 “그 다이아몬드가 바로 안나라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나는 마침내 그 다이아몬드를 찾았고, 평생토록 간직할 것이오.” 안나는 웃으며, “당신이 찾은 건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그냥 돌멩이라구요.”라고 답했다.

안나는 이날 도스토옙스키가 자기에게 청혼을 했다는 사실을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는 딸의 남편이 될 사람의 나이와 간질이라는 무서운 질병, 앞으로 딸에게 닥칠 생활고 등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결혼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당시는 안나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반년 조금 더 지난 때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병으로 그해 1866년 4월 사망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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