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는 2년 전 1863년 10월 베를린에서 수슬로바와 헤어진 후 그녀를 본 일이 없다. 그러나 편지 왕래는 있었다. 양쪽 모두 여행을 하면서 정나미는 떨어졌어도 미련은 있었던 것 같다.

도스토예스키가 『죄와 벌』을 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알론킨 하우스
도스토예스키가 『죄와 벌』을 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알론킨 하우스

도스토옙스키는 1865년 8월 10일 비스바덴에 도착했다. 수슬로바도 파리에서 곧 그곳으로 왔다. 며칠 함께 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8월 15일 도박장에서 갖고 있던 돈을 몽땅 룰렛으로 날려버렸다. 날려버린 돈 속에는 수슬로바의 것도 들어있었던 것 같다.

오도가도 못하게된 도스토옙스키는 알고 있던 게르첸(1812~1870, 러시아의 사상가 겸 작가)과 투르게네프 등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부탁편지를 보낸다.

게르첸은 거절하는 답장을 보냈고, 바덴[*1945년까지 존재했던 독일 제국의 한 주(州)]에 있던 투르게네프는 부탁한 1백 탈러(*Thaler: 1872년까지 프로이센 등 유럽에서 널리 통용되던 옛 독일 화폐)의 절반인 50탈러를 송금해 주었다.

그는 이 돈을 수슬로바에게 여비로 주었다. 그녀는 8월 20일쯤 파리로 떠났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때 수슬로바에게 청혼은 못했던 것 같다. 수슬로바의 돈까지 도박으로 몽땅 날렸으니 정작 결혼 이야기는 못 꺼냈을지도 모른다.

수슬로바가 떠나고도 도스토옙스키는 한 달 이상 비스바덴에 홀로 남아 궁핍한 생활을 계속했다. 다음은 그 당시 도스토옙스키가 수슬로바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다.

“당신이 떠나기 무섭게, 그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호텔 측은 나에게 식사와 차, 커피를 가져다 주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오. 내가 해명을 하러 갔더니 투실투실 살찐 독일인 지배인이 글쎄, 나는 식사를 제공받을 자격이 없으니, 차만을 제공하겠다고 하는 거 아니겠소?

그래서 어제부터 나는 식사는 꿈도 못 꾸고 차만 홀짝이고 있다오. 그들이 가져다주는 차 역시 지긋지긋하다오. 옷가지나 신발도 빨아주지 않는다오. 종을 울려봐도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고, 급사들 전부가 독일인 특유의 몹시 고약한 멸시로 나를 대하고 있고, 독일인들에게 돈이 없어서 계산서를 지불하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죄는 없다오.” (『도스토옙스키2』, 콘 스탄틴 모츨스키, 김현택 옮김, 책세상 2001.)

도스토옙스키는, “움직이면 식욕을 자극하기 때문에 하루 종일 앉아서 책만 본다”라고 수슬로바에게 보낸 편지에 썼다.

도스토옙스키는 수슬로바에게도 돈을 좀 보내 달라고 했지만 그녀는 아무런 답장도 보내지 않았다. 그녀는 그 무렵 파리에서 다른 남자와 신나게 연애 중이었다. 후에 그녀의 일기에서 밝혀진 것이다.

돈이 없어 꼼짝달싹할 수 없었던 도스토옙스키는 잡지사, 친구 등 돈을 빌릴 만한 모든 곳에 편지를 보냈다. 모스크바에서 발행되는 〈러시아 통보〉의 편집자 까뜨꼬프에게는 소설을 제공할 테니 300루불을 선불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이때 제공하겠다고 했던 소설이 훗날의 『죄와 벌』 이다. 『죄와 벌』은 이처럼 도스토옙스키가 비스바덴에서 최고로 궁핍한 상태에 있을 때 쓰이기 시작했다. 홀로 외롭고 배고픈 상태에서 구상되었다.

당시 몇 푼의 돈을 빌리기 위해 전당포에 드나들면서 전당포 주인에게 수모도 많이 당했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친구 밀류코프와 브란겔 남작에게도 돈을 빌려달라는 편지를 썼다. 애걸했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도스토옙스키가 『죄와 벌』을 쓴 알론킨 하우스 벽면에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가 1864~1867년까지 이 집에서 살면서 소설 『죄와 벌』을 썼다’는 표지가 붙어있다
도스토옙스키가 『죄와 벌』을 쓴 알론킨 하우스 벽면에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가 1864~1867년까지 이 집에서 살면서 소설 『죄와 벌』을 썼다’는 표지가 붙어있다

〈러시아 통보〉의 까뜨꼬프가 의외로 돈을 보내겠다고 알려왔다. 몇 년 전 도스토옙스키가 까뜨꼬프에게 소설을 보내겠다고 약속하고는 보내지 못한 전력이 있기 때문에 큰 기대는 할 수 없었는데, 의외로 답변이 온 것이다.

그런데 <러시아 통보>의 선불 2백 루블은 도스토옙스키가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후에야 송금이 되어왔다.

이 같은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구원의 손길은 있었다. 비스바덴에 와있던 러시아 정교회 사제 I. A. 야니셰프였다. 그는 도스토옙스키가 위기를 탈출할 수 있도록 얼마의 돈을 주었다. 여기에다 휴가를 마치고 근무지 코펜하겐으로 돌아온 도스토옙스키의 옛 친구 브란겔 남작도 도스토옙스키의 편지를 보고 돈을 보내주었다.

게다가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는 길에 코펜하겐을 꼭 들러서 가라고 제안했다. 그는 귀국길에 코펜하겐에 들러 브란겔 남작의 집에서 열흘을 보내고 페테르부르크로 두 달 반 만인 10월 15일 돌아왔다. 배삯은 브란겔 남작이 내주었다.

 『죄와 벌』에 나오는 라스콜리니코프 집 인근의 K다리
 『죄와 벌』에 나오는 라스콜리니코프 집 인근의 K다리

수슬로바도 도스토옙스키와 비슷한 시기에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그녀의 일기에는 1865년 11월 2일 두 사람이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E. H. 카는 이때 도스토옙스키가 수슬로바에게 청혼을 했다며 『도스토옙스키 평전』에 이렇게 썼다.

도스토옙스키는 처음도 아니지만 그녀에게 구혼을 했다. (…) 수슬로바의 거절은 처음부터 분명한 것이었다. 그는 앞서 인용했던 말을 되풀이해서, 〈당신은 자신을 한 번 내게 바쳤다는 사실 때문에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때문에 당신은 복수를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이 해석을 둘러싸고 잠시 동안 다투었다. 도리어 그녀는 〈그것이 내게 무슨 문제가 되었어요?〉라고 말 하면서 〈나는 그것을 인정하지도 거부하지도 않겠어요. 당신이야 머리가 잘 움직이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도록 하세요〉라고 대답했다. (…)

겨울 동안 몇 차례의 만남이 있었다. 다음 해 3월 그녀는 페테르부르크를 떠나 시골로 내려갔다. 아마 이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했 을 것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편지 왕래를 했고 도스토옙스키가 재혼하던 첫해에도 편지를 해서 당연하게도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의 질투를 사기도 했다. 이후 편지나 또는 다른 정보 자료도 끝나게 된다. (『도스토옙스키 평전』, E. H. 카.)

유럽에서 돌아와 홀로 외롭게 페테르부르크의 또 다른 겨울을 맞으면서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 집필을 계속한다. <계속>

글 | 이정식 작가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지구과학과)를 졸업하였고, 홍콩대 중국어문과정을 수료했다. ROTC 14기. CBS, KBS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CBS워싱턴 특파원, 정치부장, CBS 사장과 CBS 노컷뉴스 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한국방송협회 부회장, 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 예술의 전당 이사, 뉴스1 사장 및 부회장, 서울문화사 부회장을 지냈다. 언론인이자 작가이며 안중근 의사 홍보대사를 하고 있다.
서울대 언론인 대상(2009)을 수상했으며, 이정식 애창가곡 1, 2, 3, 4집 등의 음반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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