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슬로바는 당시로서는 비교적 오래 살았으나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마흔 살 때 16살이나 연하인 로자노프(*결혼 당시엔 기자였으며 후일 도스토옙스키 작품의 유명한 비평가가 된다.)와 결혼했으나 젊은 유태인 청년 골도프스키와 사랑에 빠져 6년 만에 그를 걷어찼다.

그녀는 돌아오라는 로자노프의 말에 “당신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이 수천 명이지만 당신처럼 짖어대지는 않아요. 사람은 개가 아니잖아요?”라고 대답했다고 콘스탄틴 모츨스키는 그의 책 『도스토옙스키』에 썼다.

이 책에는 로자노프가 쓴 수슬로바에 대한 기록도 함께 실려있다. 그는 수슬로바의 이름도 제대로 부르기 싫어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에 주로 사는 설치류과 동물인 마못의 암컷인 ‘수슬리하’라고 부르고 있다. 증오심의 반증이다.

사람들과 노는 마못. 인도 북부 히말라야 라다크 지역에서 촬영(2014.8.)
사람들과 노는 마못. 인도 북부 히말라야 라다크 지역에서 촬영(2014.8.)

내가 맨 먼저 수슬리하를 만난 것은 나의 학생 A. M. 세글로바의 집에서였다…… 칼라와 소맷부리가 없는 검은 의상에 (오빠의 장례식 때문에), 젊었을 적에 (눈부시게) 아름다웠을 듯한 그녀는 ‘러시아 정통주의자’였다. 능숙한 교태의 눈짓 한 번으로 그녀는 자신이 ‘나’를 사로잡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냉담하고 차분하게 말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완전히…… ‘메디치가(家)의 캐더린’(*1519~1589, 이탈리아 메디치가 출신으로 프랑스의 왕비가 된 여인. 오랫동안 섭정을 했으며 정적들을 독살했다는 의혹을 받았다)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메디치가의 캐더린을 닮았다. 그녀는 정말이지 대수롭지 않게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여자다. 또한 대수롭지 않게 사람을 죽일 수도 있었을 거다. 성 바르톨로메오의 밤에 집념에 불타올라 창문에서 위그노 교도들을 향해 신나게 총을 쏠 수 있는 사람이다.

대체로 말해, 수슬리하는 대단한 미모를 가졌다. 나는 사람들이 그녀에게 완전히 정복당하고 사로잡혀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그녀와 같은 러시아 여자를 본 적이 없다. 그녀는 정신적 기품에 있어서 완벽한 러시아인이다. 하지만 러시아인이라 한다면 그녀는 러시아 북부에 거주하는 구교도의 이단자,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자기 몸을 채찍질하는 성모’쯤 될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연구가인 모츨스키는 도스토옙스키를 일방적으로 편들지 않았다. 수슬로바와 도스토옙스키는 막상막하였다는 판정을 내린다. “수슬로바는 순진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싸움과 위험을 한껏 즐겼다. 그녀는 계산적이고 교활한 사랑 싸움을 벌였다. 이 두 연인은 막상막하의 적수였다."

『도스토옙스키 평전』의 저자 E. H. 카는 도스토옙스키는 충동성이 강하고 어린아이 같고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수슬로바는 능수능란한 말괄량이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수슬로바에게 말광량이란 표현은 너무 애교스럽고 너그러운 표현 같다. 어린 시절에는 그런 표현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아무튼 수슬로바는 도스토옙스키 소설 속의 강한 여성의 원형이 되었으니 도스토옙스키의 문학에 상당한 기여를 한 셈이다.

옴스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의 도스토옙스키 사진(파노프 작)
옴스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의 도스토옙스키 사진(파노프 작)

도스토옙스키 연구가 모츨스키에 따르면 수슬로바는 1839년 농노의 딸로 태어났다. 농노해방령이 내려진 1861년, 그녀는 22세였다. 수슬로바는 당시 사회적 변화에 관심이 많았던 전형적인 60년대(1860년대) 신여성이었다.(*당시 러시아에서는 그러한 신여성을 60년대 여성이라고 불렀다.)

수슬로바는 많은 책을 읽었고 여성해방을 옹호했다. 단편 소설도 여러 편 썼다. 그래서 그녀는 단편작가로 불린다.

고바야시 히데오의 『도스토옙스키의 생활』을 보면, 수슬로바에 대한 도스토옙스키의 딸 류보피의 이런 기록도 있다.

에메(류보피)에 따르면, 폴리나는 지방의 부자 친척한테 학비를 받아 쓰며, 페테르부르크에서 제멋대로 생활하고 있었다. 대학에 적을 두고 있으나, 수업을 듣지도 않았고 시험을 친 적도 없었다. 그러나 대학에는 늘 와서 학생들과 시시덕거리거나, 다른 학생들 집에 찾아가서 일을 방해하거나, 학생을 선동하여 소동을 일으키거나, 항의문에 서명을 하게 하거나 했다. 정치적인 시위운동 등이 있을 때에는, 언제나 행렬의 선두에 서서 붉은 깃발을 세우고 마르세이유의 노래(La Marseillaise 프랑스 국가)를 크게 불렀고, 코사크 병사에게 욕을 하다가 싸우거나, 헌병을 조롱하다가 얻어 맞거나 유치장에서 밤을 지냈을 때에는 〈혐오스런 짜리즘 (제정 러시아)〉의 빛나는 희생자로서, 학생들로부터 헹가래를 받기도 하였다. 무도회와 문학집회라면 어느 곳이든 얼굴을 비추고, 학생들과 함께 춤을 추거나 박수를 치곤 했다.

도스토옙스키와 수슬로바는 1863년 유럽 여행 후 모두 떨떠름한 기분으로 헤어졌으나 서로에 대해 약간의 미련은 갖고 있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안나와 재혼한 후에도 수슬로바는 도스토옙스키에게 편지를 보냈다. 안나는 이 편지를 보고 비로소 자기가 속기를 했던 『도박꾼』 속의 여주인공 폴리나와 같은 이름의 여인이 실재함을 알게 되었다.

1863년 10월 말 수슬로바와의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도스토옙스키는 요양차 블라지미르에 가있던 마리야를 모스크바로 옮기고 이듬해인 1864년 4월 마리야가 숨을 거둘 때까지 그녀의 곁을 지킨다. 마음속에 죄책감도 있었을 것이다.<계속>

글 | 이정식 작가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지구과학과)를 졸업하였고, 홍콩대 중국어문과정을 수료했다. ROTC 14기. CBS, KBS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CBS워싱턴 특파원, 정치부장, CBS 사장과 CBS 노컷뉴스 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한국방송협회 부회장, 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 예술의 전당 이사, 뉴스1 사장 및 부회장, 서울문화사 부회장을 지냈다. 언론인이자 작가이며 안중근 의사 홍보대사를 하고 있다.
서울대 언론인 대상(2009)을 수상했으며, 이정식 애창가곡 1, 2, 3, 4집 등의 음반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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