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H. 카는 『도스토옙스키 평전』에서 수슬로바의 파리 사건에 대해 ‘(스페인 남자에게 차인 것은) 수슬로바의 생애 중에서, 그녀가 남자에 대해서 싫증을 내기 전에 남자가 그녀에게 싫증을 낸 최초의 그리고 아마도 마지막 남자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후에 이야기하겠지만, 그녀는 한참 연하의 남자와 결혼했다가 6년 만에 헤어졌는데 그를 골탕먹이기 위해 20년 동안이나 이혼해 주지 않았다. 그녀가 얼마나 이기적 성격의 소유자였는지 알 수 있는 이야기다.

도스토옙스키가 즐겨 썼던 모자, 상트페테르 부르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소장

일단 파리에서 이탈리아로 여행을 가기로 한 두 사람은 도중에 독일의 비스바덴을 경유해 간다. 도박의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한 도스토옙스키 때문이었다.

파리로 가는 도중에 들렀을 때는 돈을 제법 따 러시아로 송금까지 했으나 이번에는 그만 갖고 있던 현금의 전부인 3천 프랑을 몽땅 잃고 말았다.

다급해진 그는 처음에 딴 돈의 일부를 보내 주었던 처제에게 송금을 부탁해 그 돈으로 제네바까지 갔다. 거기서 또다시 돈이 떨어지자 자신의 시계는 물론 수슬로바의 반지까지 저당 잡히며 궁색한 여행을 계속했다. 그렇게 이탈리아의 로마, 나폴리까지 구경했다.

그는 마침내 페테르부르크의 잡지 편집장 보보리킨에게, 잡지에 실을 소설을 쓸 테니 원고료를 선금으로 300루블만 보내 달라고 부탁했고, 그 돈을 받아 겨우 여행을 마치고 10월 말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수슬로바는 10월 초순 그와 헤어져 파리로 갔다. 두 사람은 그 후 마리야 사망 이듬해인 1865년 비스바덴에서 다시 만났으나 감정은 회복되지 않았다. 보보리킨에게는 결국 소설을 보내지 못해 형 미하일이 동생이 빌린 돈을 갚아 주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수슬로바에 대해 가슴에 불만을 가득 안고 있으면서도 오랫동안 그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그는 1865년 수슬로바의 여동생 나데즈다 프로코피예브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수슬로바에 대해 이렇게 불평한다.

아폴리나리야(=수슬로바)는 상당한 이기주의자입니다. 그녀의 이기심과 자존심은 실로 엄청났습니다. 그녀는 사람들로부터 모든 것, 완전무결함을 요구했고, 타인들의 장점을 생각함에 있어서 단 하나의 불완전함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그녀는 내가 자신의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비난하고 불평하고 욕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1863년에는 “당신은 너무 늦게 왔어요…….”라는 말로 나를 맞이한 적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는 누구와 사랑에 빠졌다는 겁니다. 바로 2주일 전만 해도 나를 사랑한다고 정열적인 편지를 보냈던 그녀가 말입니다…….

나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몹시 사랑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하고 바랄 뿐입니다. 그녀는 나의 그런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녀는 항상 즉흥적인 경멸감으로 나를 대합니다…….

그녀는 우리의 관계에서 평등이란 개념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글쎄요. 그녀는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녀는 왜 지금도 내게 고통을 주고 있을까요? (『도스토옙스키1』, 모츨스키)

수슬로바 역시 도스토옙스키에 대해 좋은 감정이 아니다. 수슬로바의 일기를 보면, “나는 그저 그를 증오할 뿐이다…. 2년 전의 나를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도스토옙스키를 증오하게 된다. 그는 나의 신념을 말살시킨 최초의 인물이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2년 전이라는 것은 함께 유럽여행을 했던 1863년을 말하는 것 같다. 두 사람은 그 여행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기는커녕 속으로는 상대에게 진저리를 낸 것 같다.

수슬로바와의 유럽 여행 3년 후 소설 마감 시한에 쫓겨 두 번째 부인이 되는 안나 그리고리예브나가 속기로 받아 쓴 『도박꾼』(『노름꾼』으로 번역하기도 한다)에서는 수슬로바와 이름이 같은 폴리나가 여주인공이다.

이 소설에서는 폴리나 수슬로바가 아니라 폴리나 알렉산드로브나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강하고 이기적인 수슬로바의 성격을 그대로 닮은 여성이다.

『도박꾼』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좋아하는 폴리나로부터 이용당하면서도 무시당하는 주인공 알렉세이를 통해 폴리나에 대한 분한 감정을 그 대로 토해낸다. 도스토옙스키가 수슬로바에게 갖고 있던 감정이 그랬는지 모른다.

젊은 시절, 선배 작가의 부인에게 관심을 갖기도 한 도스토옙스키는 첫 부인 마리야와 결혼하기 전에는 여성을 사귄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정치범으로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날 때인 28세까지 이성과의 교제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파나예바
파나예바

다만 24~25세쯤, 작가 파나예프의 부인 아브도찌야 파나예바를 연모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뿐이다. 도스토옙스키는 24세 때인 1845년 『가난한 사람들』로 작가로서 첫 성공을 거둔 후 선배 작가 파나예프의 집을 처음 방문했다.

이날 아브도찌야 파나예바를 보고 돌아온 후, “나는 그의 아내에게 매료된 것 같다. 그녀는 지적이고 훌륭하며, 게다가 사랑스럽고 말할 수 없이 우아한 자태를 지니고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아브도찌야 파나예바도 도스토옙스키의 그런 감정을 알아차렸다. 후일 그녀는 자신의 회상기에서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적었다. 별로 호의적이지 않다.

도스토옙스키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가 몹시도 신경 과민적이고 민감한 청년 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바짝 마른 데다 키는 작고, 옅은 머리빛에 병자 같은 안색을 하고 있었다. 크지 않은 회색 눈동자는 어쩐지 불안하게 이쪽저쪽으로 움직이고, 창백한 입술은 신경질적으로 바르르 떨렸다. 젊음과 신경 증세 때문에 그는 자신을 제어할 줄 몰랐고 자신의 자존심 또는 작가적 재능에 대한 고상한 의견을 지나치게 분명히 피력했다. (『도스토옙스키1』, 모츨스키.)

도스토옙스키가 파나예바에게 관심을 가졌던 기간은 길지 않았다. 뒤에 더 이야기하겠지만, 1864년 마리야가 죽고 1867년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와 재혼하기 전 도스토옙스키는 최소 세 명의 여성과 재혼을 시도했다. 폴리나 수슬로바도 그중 하나다.

그는 마리야가 죽은 다음 해인 1865 년 여름, 수슬로바에게 청혼하기 위해 독일까지 달려갔었다. 그 사이에 두 사람이 더 등장하는데 안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와 마르타 브라운이라는 여성이다. 그들은 문학잡지 〈세기〉(*형 미하일과 만든 〈시대〉 폐간 후 복간하면서 바꾼 제호)에 원고를 보냈거나 그의 잡지사에서 일 했던 사람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두 여성과 교제를 했고 청혼도 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이 가운데 폴리나 수슬로바는 도스토옙스키에게 두고두고 깊은 애증의 대상이다. 그녀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 여러모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계속>

글 | 이정식 작가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지구과학과)를 졸업하였고, 홍콩대 중국어문과정을 수료했다. ROTC 14기. CBS, KBS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CBS워싱턴 특파원, 정치부장, CBS 사장과 CBS 노컷뉴스 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한국방송협회 부회장, 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 예술의 전당 이사, 뉴스1 사장 및 부회장, 서울문화사 부회장을 지냈다. 언론인이자 작가이며 안중근 의사 홍보대사를 하고 있다.
서울대 언론인 대상(2009)을 수상했으며, 이정식 애창가곡 1, 2, 3, 4집 등의 음반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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