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는 남편에게 “살기 힘들다”고 고백하면서 “두세 달이라도 평온하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또한 “지금 상황으로는 예전에 꿈꿨던 것처럼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없을뿐더러 어쩌면 영원히 갈라서게 될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안나는 남편에게 “우리의 사랑과 행복을 지켜달라”고 간청하다가 자제력을 잃고 울기 시작했다.

안나가 울기 시작하자 도스토옙스키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안나를 달래기 위해 황급히 모든 것을 안나의 뜻대로 하자고 했다. 안나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행인들의 시선도 개의치 않고 도스토옙스키를 끌어안고 키스를 퍼부었다.

도스토옙스키는 형수와 의붓아들이 요구하는 돈을 일부 주고 나머지 부족분은 물건들을 처분한 뒤 장모를 통해 주기로 하고 남은 물건들은 여기저기에 맡겼다. 그리고 마침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유럽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결혼 약 두 달 후인 4월 14일이었다. 당초엔 신혼여행을 빙자해 석 달 예정으로 떠났지만, 그들은 4년 후에야 러시아로 돌아왔다. 안나가 남편의 친척들과 의붓아들 때문에 러시아로 돌아가기 싫어한 것도 해외 체류가 길어진 이유였다.

물론 빚쟁이들로부터의 도피도 또 다른 중요한 이유이다. 당시 도스토옙스키가 갚아야 할 빚은 2만 루블에 달했는데, 모피코트가 25루블, 교사의 1년 연봉이 1천 루블쯤 할 때다. 해외로 나가 두 사람은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 바젤 미술관에 있는 한스 홀바인의 ‘그리스도의 시신’
◇ 바젤 미술관에 있는 한스 홀바인의 ‘그리스도의 시신’

유럽 생활은 고단했다. 베를린에서 시작해 드레스덴, 바젤, 제네바, 바덴바덴, 베베, 밀라노, 피렌체, 베네치아, 볼로냐, 빈, 프라하 등을 전전했다. 그림을 좋아했던 도스토옙스키는 가는 곳마다 미술관을 찾았다. 이런 곳에 갈 때는 물론 안나와 함께였다.

도스토옙스키는 특히 드레스덴 미술관에 있는 라파엘로의 작품 ‘시스티나의 성모’를 좋아했다. 그는 이 작품이야말로 인간의 천재성이 가장 잘 발휘된 작품이라며 언제나 경탄해마지 않았다.

지금은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이 되어있는, 그가 숨을 거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아파트 서재에는 이 작품의 복제품이 걸려있다. 생전에 누군가로부터 선물받은 것이다. 전체 그림을 온전히 복제한 것이 아니라 마리야가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윗 부분만을 복제한 것이다. 2018년 5월 필자가 카자흐스탄 세메이의 도스토옙스키 문학박물관에 갔을 때도 이 복제 그림이 도스토옙스키와 안나의 사진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또 그가 깊은 인상을 받은 그림은 바젤 미술관에 있는 한스 홀바인의 종교화 ‘그리스도의 시신’이다. 안나는 바젤 미술관에 함께 갔을 때 이 그림을 보았다. 십자가에서 숨진 뒤 끌려 내려와 썩도록 방치된 참혹한 예수의 모습을 상상하여 그린 것이다.

안나는 마침 임신 중이어서 이 그림을 오래 보지 않으려고 다른 전시실로 갔는데, 15분인가 20분쯤 후에 돌아와 보니 도스토옙스키가 여전히 그곳에 붙박힌 듯 서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흥분된 얼굴에 겁에 질린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스토옙스키의 간질 발작이 시작되는 순간 안나가 여러 번 본 표정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남편의 팔을 잡고 그를 다른 전시실로 데리고 가 의자에 앉혔다. 이날 다행히도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별실에는 ‘그리스도의 시신’ 복제화가 걸려있다.<계속>

글 | 이정식 작가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지구과학과)를 졸업하였고, 홍콩대 중국어문과정을 수료했다. ROTC 14기. CBS, KBS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CBS워싱턴 특파원, 정치부장, CBS 사장과 CBS 노컷뉴스 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한국방송협회 부회장, 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 예술의 전당 이사, 뉴스1 사장 및 부회장, 서울문화사 부회장을 지냈다. 언론인이자 작가이며 안중근 의사 홍보대사를 하고 있다.
서울대 언론인 대상(2009)을 수상했으며, 이정식 애창가곡 1, 2, 3, 4집 등의 음반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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