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의 신혼집은 미망인이 된 도스토옙스키 형수 에밀리야 페도로브나가 조카들과 살고 있는 집과 5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이 때문에 형수와 조카들이 노상 그 집에 드나들었다. 남동생 니콜라이, 여동생 알렉산드라도 자주 찾아왔다. 이들은 점심을 먹은 후 밤 10시 11시까지도 돌아가지 않는 날이 많았다. 또한 문인 손님들의 방문도 잦았다.

그런 가운데 에밀리야 페도로브나는 처음보다 안나에 대한 태도가 누그러지기는 했지만, 살림살이에 대한 충고를 한다면서 늘 안나를 가르치려고 했을 뿐 아니라 번번이 도스토옙스키 첫 부인 마리야의 예를 들먹여 안나를 불쾌하게 했다.

첫 부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사려없는 짓이었다. 안나는 회고록에 “에밀리야는 착하긴 하지만 생각이 얕은 여자였다”라고 썼다.

결혼 초기 안나는 매일같이 찾아오는 친척과 어린 조카들과 손님들을 접대하는 데 하루 하루를 보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함께 사는 의붓아들 파벨은 거친 언행으로 안나를 괴롭혔다.

파벨은 모친인 마리야가 사망한 후 이런저런 집안일들을 처리해 왔는데, 도스토옙스키가 재혼을 하자 자기가 해 오던 일을 안나에게 빼앗긴 것으로 생각하고 자주 안나를 골탕먹이려고 했다.

파벨은 도스토옙스키의 면전에서는 안나에게 공손한 태도를 취했으나 도스토옙스키가 없을 때는 안나를 거친 말과 태도로 대했다. 파벨은 안나에게 도스토옙스키가 그녀와 결혼한 것은 ‘대단히 멍청한 짓’이었으며, 안나가 ‘엉터리 주부’이고, ‘우리 모두의 돈’을 헤프게 쓰고 있다면서 결혼 후 도스토옙스키의 발작이 심해졌는데 이는 안나의 책임이라고 폭언을 해대기도 했다.

그런데다가 어느 날 도스토옙스키는 파벨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파벨에게 상처를 주지 말라”고 안나에게 말하기도 했다. 안나는 파벨이 자신을 중상모략한다고 생각했다.

도스토옙스키는 파벨의 행태를 알지 못하거나 모르는 척하는 것 같았다. 자기에게 적대감을 보이는 의붓아들을 보호하려는 도스토옙스키의 태도를 안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안나는 “그 사이 도스토옙스키의 사랑이 식었나” “이러다가 결혼 생활이 비극적으로 끝나는 것은 아닐까”하는 우려를 하기 시작했다.

◇ 독일 드레스덴 미술관에 있는 라파엘로의 ‘시스티나의 성모’. 도스토옙스키가 가장 좋아한 그림이었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 온 도스토옙스키는 설움에 복받쳐 엉엉 우는 안나를 보게 되었다. 파벨로부터 폭언을 들은 날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비로소 의붓 아들의 폭언과 친척들의 일로 안나가 몹시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안나에게 잡지사로부터 선금을 받아 해외에 몇 달 다녀오자고 제의한다.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 통보〉와 장차 보낼 자신의 작품의 선금을 교섭했다. 〈러시아 통보〉는 도스토옙스키에게 1천 루블을 지급하기로 했다.

도스토옙스키가 해외로 나갈 것이라고 선언하자, 친척들은 모두 반대한다면서 몇 달치 살림 비용을 미리 달라고 요구했다. 친척들의 살림 비용, 급히 갚아야 할 빚 등을 계산해 보니 1천4백 루블이 당장 필요했다. 선금 1천 루블로는 도저히 여행을 떠날 비용을 마련할 수 없었다. 최소한 2천 루블은 있어야 해결될 상황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여행 계획이 무산되게 된 데 대해 안타까워했다. 그는 안나에게 미안해하며 가을까지 몇 달 더 기다려 보자고 했다.

희망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듯했던 그때 문득 안나의 머릿속에 “내 지참금과 물건들을 모두 여행을 위해 내어 놓으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해서 나의 행복을 구하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안나는 친정으로 가 어머니를 설득했다. 어머니는 딸의 행복을 위해 그녀의 청을 받아들였다. 결혼할 때 가져온 패물과 가구, 모피옷 등을 팔거나 전당포에 저당잡히고 돈을 마련하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 온 안나는 남편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남편을 따라 나와 강변도로를 함께 걸으며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안나의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안나의 물건들을 희생하면서까지 해외여행을 갈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계속>

글 | 이정식 작가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지구과학과)를 졸업하였고, 홍콩대 중국어문과정을 수료했다. ROTC 14기. CBS, KBS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CBS워싱턴 특파원, 정치부장, CBS 사장과 CBS 노컷뉴스 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한국방송협회 부회장, 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 예술의 전당 이사, 뉴스1 사장 및 부회장, 서울문화사 부회장을 지냈다. 언론인이자 작가이며 안중근 의사 홍보대사를 하고 있다.
서울대 언론인 대상(2009)을 수상했으며, 이정식 애창가곡 1, 2, 3, 4집 등의 음반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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