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시 반쯤 예약한 세미팔라틴스크 호텔에 도착했다. 이 호텔은 한때 이 도시의 대표적인 호텔이었다고 하는데, 엘리베이터는 성인 4명 정도가 겨우 탈 수 있는 작은 구형 모델이었다. 객실도 크지 않았다. 모든 게 구소련 시절의 설비 그대로인 듯했다.

▲ 세메이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입구 ▲ 전시실 내부 ▶ 전시실의 도스토옙스키 사진 ▼ 벽화와 전시물에 대해 설명하는 이리나 부관장
▲ 세메이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입구 ▲ 전시실 내부 ▶ 전시실의 도스토옙스키 사진 ▼ 벽화와 전시물에 대해 설명하는 이리나 부관장

짐을 객실에 내려놓고 곧바로 도스토옙스키 문학박물관으로 갔다. 3시쯤 도착할 것이라고 미리 알려 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옴스크의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등에 가 봤기 때문에 그 중 가장 작은 도시인 세메이의 박물관에 대해 큰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예상 외로 세메이 박물관은 규모가 다른 곳에 비해 오히려 더 커보였고 전시물도 비교적 충실했다. 이리나 솔로비요바 부관장이 나를 안내했다.

전시물은 다른 곳처럼 사진과 서적이 위주였지만, 소설에 들어있던 삽화, 유형수들의 족쇄 등을 전시해 놓은 외에 출구 쪽 벽면에 대형 벽화를 피, 땀, 눈물, 관계 등 테마로 그려놓은 것이 특이했다. 고난에 찼던 도스토옙스키의 세계를 추상적으로 그린 것이라고 했다.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작가 게오르기 꼬즈리찐의 1976년 작품이다.

그리고 더욱 특징적인 것은 도스토옙스키와 이곳에서 교류했던 젊은 카자흐인 학자 초간 발리하노프(1835~1865)의 흉상과 동상을 박물관 안과 밖에 도스토옙스키의 상과 나란히 세워 놓은 것이다.

발리하노프는 징기스칸의 후손인 카자흐스탄의 민족 영웅 아블라이칸의 4대 손으로 서방세계에 카자흐스탄 지역을 가장 먼저 알린 역사학자요 인문·지리학자였다.

그는1854년 2월, 옴스크를 방문했을 때 수용소에서 갓 석방된 도스토옙스키를 처음 알게 된 후 세미팔라틴스크에서도 도스토옙스키를 만났다. 두 사람은 열네 살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문학과 예술, 역사 등에 대해 이야기 상대가 되어 편지도 교환하는 등 가깝게 지냈다. 발리하노프는 아쉽게도 30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세메이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마당의 도스토옙 스키(오른쪽)와 발리하노프 동상 / 도스토옙스키(오른쪽)와 발리하노프(세미팔라틴스 크에서 찍은 1850년대 후반 사진)
세메이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마당의 도스토옙 스키(오른쪽)와 발리하노프 동상 / 도스토옙스키(오른쪽)와 발리하노프(세미팔라틴스 크에서 찍은 1850년대 후반 사진)

카자흐스탄 최대 도시 알마티에는 발리하노프의 이름을 딴 도로가 있다. 그는 교과서에도 이름이 등장하는 카자흐스탄의 유명한 역사적 인물이다. 알마티에 러시아 소설가 고골 거리도 있다는 것을 덧붙여둔다.

세메이의 도스토옙스키 문학박물관 앞 도로의 이름은 도스토옙스키길이었다. 세메이 도스토옙스키 문학박물관은 외형적으로 두 개의 건물로 이뤄져있다. 하나는 도스토옙스키가 신혼시절 살던 통나무집이고, 하나는 1971년에 지어진 2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이다. 두 건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세메이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측면의 벽화
세메이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측면의 벽화

콘크리트 건물 2층과 통나무집 2층이 박물관 전시실이다. 먼저 박물관으로 지어진 건물의 2층 전시실을 보고난 후 서재와 응접실, 침실 등이 있는 통나무집 2층으로 이동하는 것이 방문코스 같았다. 새 건물 1층에는 사무실이 있고 일부는 소규모 전시를 위한 대여 공간으로 쓰이고 있었다.

통나무집은 박물관 로비에서 계단을 통해 연결된다. 통나무집 뒷 부분 일부를 뜯어서 새로 지은 박물관과 연결해 놓았다.

이리나 부관장의 안내로 박물관 전시실과 통나무집 2층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나는 세메이에서의 둘째 날인 5월 5일, 한국에서는 어린이날이었던 이날 오전 일찍 박물관에 다시 갔다. 전날 날이 흐려 제대로 못 찍은 박물관 외관도 한 번 더 찍고 전시실도 재차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이날 10시 반경부터 다시 비가 내렸지만 그 이전까지는 비교적 청명했다. 일찍 아침을 먹고 호텔에서 도보로 20여 분 만에 박물관에 도착했다. 차를 타고 갔던 길과 다른 방향으로 박물관에 다다르게 되었다.

다가가며 보니 건물 측면에 커다란 벽화가 보여 처음엔 다른 건물인 줄 알았다. 전날 보지 못한 도스토옙스키를 상징하는 펜 등을 그린 대형 그림이다. 다시 가지 않았다면 건물 옆면에 이런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세메이를 떠날 뻔했다.

박물관이 문을 여는 9시 전에 도착했으므로 먼저 박물관 외곽을 카메라로 찍고 있는 사이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니 구면이 된 이리나 부관장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나는 이리나 부관장에게서 전날 방문 때 들었던 도스토옙스키 신혼집 월세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첫째 날 이리나는 도스토옙스키가 세를 살았던 통나무집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집의 주인은 우체부였으며 1층은 주인집에서 쓰고 2층을 도스토옙스키에게 세를 주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당시 월세가 은화 8루블이었는데, 도스토옙스키가 받은 군인(준위) 봉급인 은화 16루블의 절반이라고 했다. 그 당시 소 한 마리 값이 3루블 정도였으므로 이 집은 꽤 비싼 집이었다고 설명했다. 하긴 앞서 브란겔의 회고록에서 보면 당시 세미팔라틴스크에는 통나무 단층집만 즐비했었다는데, 그 가운데 2층집은 눈에 띄는 꽤 좋은 집이었다고 할 수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시베리아 신혼집
도스토옙스키의 시베리아 신혼집

전날 저녁 식사후 호텔로 돌아와 메모해 온 이리나의 설명을 정리하다 보니 통나무집 2층 월세가 거의 소 세 마리 값이었다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요즘 우리나라 한우는 보통 한 마리에 5~6백만 원, 때로는 1천만 원이 넘는 소도 있다. 물론 한국의 최근 한우값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리 19세기의 시베리아라고 할지라도 소 세 마리 값을 월세로 낸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나는 그때의 소 값은 지금하고는 많이 달랐을 것이라면서, 당시 이 집은 동네에서 좋은 집에 속했다고 했다.

통나무집의 침실
통나무집의 침실

봉급의 반을 집세로 낸다는 것은 어느 시절에나 누구에게나 큰 결단이 필요한 일일 것이다. 그러면 왜 도스토옙스키는 이처럼 자기 분수에 비추어 그렇게 비싼 신혼집을 얻었을까?

유형수였던 그가 첫사랑이요, 첫 부인이 된 마리야 이사예바에게 쏟은 애정과 가슴 졸이던 결혼과정을 살펴보면 그의 형편에 다소 무리가 됐을 그런 집을 얻은 것이 어느 정도 이해도 된다. 도스토옙스키가 다소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이기도 했지만……. 그는 결혼 전, 형 미하일에게도 돈을 부쳐달라고 했고 여기저기에서 돈을 빌렸다.

부부는 시베리아를 떠날 때까지 이 집에서 2년 반을 살았다. 하지만 결혼 후 두 사람의 생활에 대해서는 도무지 전해지는 이야기가 없다. 도스토옙스키는 준위(장교 대우 하사관)로서 군 생활을 마지못해 이어가면서 마리야와 결혼 후에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글쓰기에 힘을 쏟았다.

당초 강제 군복무 기간은 4년이었지만, 실제로는 5년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는 차르 알렉산드르 2세 즉위 후 정치범들에게 다소 유연해진 분위기 속에 시베리아를 벗어날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가 유럽러시아로의 귀환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을 것임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도스토옙스키가 만약 유럽러시아로 귀환하지 못한 채 시베리아에 그대로 살다가 생을 마쳤다면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같은 대작들을 남길 수 있었을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정해진 형기를 마친 이후에도 죽을 때까지 시베리아에서 살아야하는 유형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시베리아 시절의 후반에 찾아온 정치적 환경의 변화로 시베리아를 떠날 수 있게 된 것은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볼셰비키 혁명 후 소련 시절에는 세미팔라틴스크의 그 통나무집에서 네 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말하자면 아파트가 된 것이다.

영화 ‘닥터 지바고’를 보면 혁명 후 2층으로 된 지바고의 장인의 집에 여러 가구가 들어와 함께 사는 모습이 나오는데, 바로 그 같은 공동 주택으로 사용됐던 것이다.

1960년대에 도시정비계획에 따라 이 목조건물이 철거될 위기에 놓였었다. 지붕을 뜯어낸 상태에서 지역 문인들과 예술인들이 역사적 장소인 이 집을 보존해야 한다고 당국에 청원해 철거를 중단했다고 한다. 그 뒤 1971년 이 목조건물에 연결하여 콘크리트로 지어진 2층 규모의 도스토옙스키 문학 박물관을 개관하게 되었다.<계속>

글 | 이정식 작가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지구과학과)를 졸업하였고, 홍콩대 중국어문과정을 수료했다. ROTC 14기. CBS, KBS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CBS워싱턴 특파원, 정치부장, CBS 사장과 CBS 노컷뉴스 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한국방송협회 부회장, 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 예술의 전당 이사, 뉴스1 사장 및 부회장, 서울문화사 부회장을 지냈다. 언론인이자 작가이며 안중근 의사 홍보대사를 하고 있다.
서울대 언론인 대상(2009)을 수상했으며, 이정식 애창가곡 1, 2, 3, 4집 등의 음반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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