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9월 어느 날, 제주대의 양중해 교수가 관덕정 근처에 있던 제주MBC에 들어왔다. 양 교수는 당시 프로그램 출연 차 일주일에 한번 가량 방송국에 들렀다.제주 MBC엔 양 교수가 과거 오현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할 때의 제자인 아나운서 출신 김순두 씨가 라디오 편성부장을 하고 있었다. 김순두 씨는 제주 최초의 TV 아나운서로 제주에선 이름이 널리 알려진 분이다.김 부장은 편성국으로 들어오는 양중해 교수를 반갑게 맞았다. 출연에 앞서 양 교수와 차를 한잔 나누고 있는데, 가 라디오에서 흘러 나왔다.양 교수가 불
스물여덟 살 난 러시아청년이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문학서클에 참여했다가 반역죄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습니다.청년이 처형대에 오르자 사형집행관이 외칩니다. “마지막 5분의 시간을 주겠다.”5분 뒤면 목숨이 끊어질 순간, 그는 먼저 가족과 친구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삶을 참회합니다.그때 또 집행관이 외칩니다. “2분 지났다.” 참회할 시간도 부족했습니다. 나는 왜 그토록 헛된 삶을 살았던가?집행관이 다시 외칩니다. “또 2분이 지났다.”마지막 남은 1분 동안 청년은 삶의 마지막 눈길을 들어 주위의 세상을 둘러봅니다. 저
"나에게 마지막 5분이 주어진다면, 2분은 동지들과 작별하는데, 2분은 삶을 돌아보는데, 그리고 마지막 1분은 세상을 바라보는데 쓰고 싶다. 언제나 이 세상에서 숨을 쉴 수 있는 시간은 단 5분 뿐이다."-도스토옙스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1821~1881), 러시아의 작가, 철학가1849년 12월, 러시아 세묘뇨프 광장에 위치한 사형장의 사형대 위에 반체제 혐의로 잡혀온 28세의 청년이 서 있었다.집행관이 소리쳤다. "사형 전 마지막 5분을 주겠다"사형수는 절망했다. '내 인생
스타라야루사의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은 도스토옙스키 가족이 살던 2층의 6개 방을 주전시실로 하고 있다. 1층에는 작은 세미나실 같은 방이 있는데, 벽면과 유리전시대에 유형살이와 관계된 인물들의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율리야 유흐노비치 관장 대행은 우리를 만나자 바로 2층으로 올라가 2층 베란다에 놓여 있는 도스토옙스키 초상화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했다.초상화는 우리가 가장 많이 보아 온 도스토옙스키 초상화였다. 당대의 유명한 화가 바실리 페로프(1833~1882)가 그린 것이다. 원본일까?관장은 이곳의 초상화는 페로프가 그린 원본이
한편, 도스토옙스키와 안나가 결혼 두 달 만에 빚쟁이와 친척들을 피해 무작정 러시아를 떠난 지도 어느새 4년이 되었다. 두 사람은 유럽에서의 방랑을 그만 끝내고 러시아로 돌아가고 싶었다.안나와 결혼 전 완성한 『죄와 벌』의 성공으로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 문단에서 다시 인정받기 시작했다. 거기에다 유럽에서 지내는 동안 발표한 『백치』, 『영원한 남편』, 『악령』(*악령은 귀국 후 마무리했다) 등의 작품으로 러시아 내에서의 도스토옙스키의 작가로서의 명성은 꾸준히 높아졌다.그런데 막상 러시아로 돌아가려니 친척들 문제도 문제지만 그보다는
도스토옙스키 부부의 유럽 생활은 늘 돈에 쪼들리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러시아 통보〉 등에서 부쳐주는 원고료로 겨우겨우 생계를 이어갔다.그러는 사이에 첫아이가 생겼다. 1868년 2월, 부부는 제네바에서 첫딸 소냐(소피야)를 얻고 뛸 듯이 기뻐했다. 도스토옙스키의 나이 47세에 얻은 첫아이였다.길눈이 어두웠던 도스토옙스키는 소냐가 태어나기 전 산파가 사는 집이 산비탈에 모양이 비슷비슷한 거리들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고는 산파 집으로 가는 길을 익히기 위해 3주간이나 그 동네로 산책을 다녔다.밤중에 갑자기 부르러 갈 일이
마리야와 형 미하일이 잇달아 죽은 1864년은 도스토옙스키에게 매우 힘든 한 해였다. 도스토옙스키는 1864년 후반부터 다음 해 초에 걸쳐 두 사람의 여성을 상대로 재혼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두 여성의 이름은 안나 바실리예브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와 마르타 브라운이다. 그 중 안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는 두 번째 부인이 된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의 회고록에도 자세히 기록될 만큼 도스토옙스키와 우정의 관계를 오래 유지한 특이한 케이스다.안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는 도스토옙스키가 운영하던 〈세기〉 잡지에 원고를 보냈던 문학소녀였다. 단편소
“그저 계집한테는 그냥 채찍밖에 없어요. 안 그러면 그런 인간은 다스릴 방법이 없다고요!” 그(예브게니의 친구인 장교)는 거의 큰 소리로 말했다. (그는 전부터 예브게니의 심복이었던 것 같았다.)나스타시야는 일순간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녀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그녀는 두 발자국가량 떨어져 있는, 전혀 생면부지의 젊은이에게 달려갔다. 그는 손에 가늘게 땋은 채찍을 쥐고 있었다. 나스타시야는 그의 손에서 그 채찍을 낚아채어 그녀를 모욕한 자의 얼굴을 힘껏 내리쳤다. 이 모든 것이 한순간에 벌어졌다.” (『백치』, 540~541쪽.
도스토옙스키는 1866년에 쓴 소설 『도박꾼』에서 폴리나를 여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여주인공 이름은 폴리나 알렉산드로브나. 허구적인 소설이지만 소설 속 여주인공 폴리나의 성격은 바로 폴리나 수슬로바다. 이름을 그대로 따왔다.『도박꾼』의 주인공이자 도박꾼 알렉세이 이바노비치가 사랑하는 대상인 폴리나는 속을 알 수 없는 도도하고 변덕스러운 미녀다. 그녀는 자기를 좋아하는 주인공 알렉세이에게 돈을 주면서 룰렛 도박을 해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따서 자기에게 달라고 시킨다.소설 속의 폴리나는 알렉세이를 사랑하면서도 경멸한다. 알렉세이 또한
거실이었을 첫 번째 전시실에는 초입에 있는 마리야의 전신 그림과 함께 도스토옙스키의 대형 얼굴 그림, 도스토옙스키가 브란겔 남작에게 쓴 편지의 사본, 도스토옙스키의 고난을 상징하는 사형장에서 입었던 흰색 수의를 다소 추상적으로 나타낸 모형물 등이 있었다. 또 둥근 탁자 앞에 앉아 도스토옙스키의 편지를 읽고 있는 모습의 마리야의 디오라마(박물관의 입체 모형)가 창문 옆에 있다.두 번째 방은 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아에서 쓴 작품인 『아저씨의 꿈』에 나오는 여주인공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모스깔료바의 살롱을 소설에서 묘사된 것처럼 소파, 거
두시 반쯤 예약한 세미팔라틴스크 호텔에 도착했다. 이 호텔은 한때 이 도시의 대표적인 호텔이었다고 하는데, 엘리베이터는 성인 4명 정도가 겨우 탈 수 있는 작은 구형 모델이었다. 객실도 크지 않았다. 모든 게 구소련 시절의 설비 그대로인 듯했다.짐을 객실에 내려놓고 곧바로 도스토옙스키 문학박물관으로 갔다. 3시쯤 도착할 것이라고 미리 알려 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옴스크의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등에 가 봤기 때문에 그 중 가장 작은 도시인 세메이의 박물관에 대해 큰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그런데 예상 외로 세
그래도 다행히 운은 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한 해 전인 1855년 가을, 사병에서 하사관으로 승진된 데 이어 결혼 문제로 애를 태우던 그해 1856년 10월에는 장교대우로 승진되었다. 이처럼 상황이 좋아진 이유는 정치범들에게 가혹했던 니콜라이 1세가 1855년에 죽고 아들 알렉산드르 2세가 즉위한 후 시베리아 종신 유배형에 처해졌던 데카브리스트들에게 30년 만에 사면령을 내리는 등 정치범들에게 유화적인 조치를 취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건이 한결 좋아지면서 마리야와의 결혼에 성공할 가능성도 차츰 커졌다. 그즈음인 1856년 11월
성경책은 도스토옙스키의 생애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그 때문에 도스토옙스키 관련 박물관에는 어디에나 오래된 당시의 성경책을 비치해 놓고 있다.물론 어느 것도 도스토옙스키가 유형시절 보던 원본은 아니다. 원본은 모스크바의 국립 레닌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도스토옙스키는 토볼스크에서 폰비지나로부터 받은 성경책을 평생 소중하게 간직했고, 죽기 직전 아들 페쨔(표도르의 애칭.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이 같다.)에게 주었다.옴스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에도 데카브리스트 부인들이 당시 도스토옙스키에게 준 것과 같은 1823년
앞의 E. H. 카의 『도스토옙스키 평전』과 『백치』에서의 소설적 묘사보다 후일 두 번째 아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가 도스토옙스키 사후에 쓴 회고록의 관련 대목이 당시 도스토옙스키의 심리상태를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될 듯하다.안나는 1866년 속기사로서 도스토옙스키를 처음 찾아간 날 그가 죽음 직전까지 갔었던 지난날 처형장에서의 쓰라린 기억을 들려주었다며 이렇게 기록했다.“세묘노프스키 광장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동지들 틈에 서서 형집행을 준비하는 것을 보고 있던 기억이 나오. 살아있을 시간이 이제 겨우 5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도스토옙스키는 이처럼 사형을 피할 수 있다는 일말의 기대도 할 수 없는 사실 속에 처참한 고통이 있었다는 자신의 경험을 소설 속에 털어놓았다.사형장에서의 상황은 『백치』에서 처형 직전 살아난 어떤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라며 다음과 같이 보다 구체적으로 서술된다.“그 사람은 다른 죄수들과 함께 사형대 위로 끌려가서 정치범으로 총살형을 받는다는 선고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20분쯤 후에 사면령이 내려져 그보다 감형된 형량을 선고받게 되었지요.(……) 그는 마치 어제 일처럼 모든 걸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몇 분 동안 어느 한
도스토옙스키가 처형 직전 감형되어 목숨을 건지는 극적인 장면에 대해 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1892-1982)는 그의 『도스토옙스키 평전』(1931)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군법회의에서 내린 사형 판결은 바뀌었다. 그러나 사형을 집행하는 듯한 쇼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젊은이들에게 두려운 인생의 교훈을 준다는, 잔인하면서도 소박한 바람에서 나온 것이지 단순히 넓은 자비심을 보이려는 황제의 허영심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었다. 사형 중지 결정을 알지 못했던 죄수들은 마차로 처형장까지 갔다. 사형 선고문이 읽히고 사제는
◆ 『죄와 벌』의 전당포 노파처럼 최후를 마친 도스토옙스키의 큰 여동생 바르바라도스토옙스키는 7남매 중 둘째였다. 위로 한 살 위의 형 미하일이 있고, 아래로 큰 여동생 바르바라를 포함, 동생이 다섯이었다.가족 사진은 도스토옙스키 7남매 중 도스토옙스키의 제일 아래 남동생 니콜라이를 뺀 6명 각각의 사진과 도스토옙스키 아내 안나와 딸 류보피, 아들 표도르 등 셋이 함께 찍은 사진, 그밖에 두 조카의 사진 등을 한 액자에 모아 놓은 것이다.형 미하일, 동생 안드레이, 장녀 바르바라, 차녀 베라, 막내 여동생 알렉산드라, 베라의 딸 마
◆ 진눈깨비 내리는 검은 대지모스크바 동남쪽에 있는 다로보예는 도스토옙스키의 가족 영지가 있던 곳이다. 도스토옙스키는 10대 시절 수년간을 여름마다 가족과 이곳에서 보냈다. 그가 갖고 있는 농촌생활의 기억은 이곳에서 겪은 것이 전부다.다로보예에서 있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단편으로 쓴 것이 『농부 마레이』다. 짧은 단편인데 내용적으로는 수필에 가깝다.그가 『농부 마레이』를 남기지 않았다면, 다로보예에 지금과 같은 미니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인들 남아있을 것 같지 않다.이곳은 아직도 과거와 같이 너른 벌이 펼쳐져 있는 농촌일 뿐, 도스토
◆ 형장에 선 도스토옙스키1849년 12월 22일.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세묘노프스키 사형장. 한겨울 추위 속에 28세의 젊은 소설가 도스토옙스키가 처형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처형대 맞은편에는 소총수들이 기다란 총에 장전을 한 채 대기 중이다.사형수들은 세 개의 기둥에 각각 한 명씩 묶인다. 도스토옙스키는 긴 줄의 앞에서 여섯 번째였다. 한 번에 세 명씩이므로 처형되는 두 번째 그룹이었다. 차르의 전제체제를 비판하는 독서 모임에 가담한 죄로 죽음의 문턱에 서게 된 것이다.처형이 시작되기 직전, 갑자기 나팔 소리가 울려
충치가 없는 사람은 과연 잇몸질환도 없을까? 흡연, 스트레스, 약물 부작용, 영양결핍, 심장질환, 가족력 등 다양한 요인이 잇몸병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충치 없이도 잇몸질환은 얼마든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미국 의료포털 ‘웹엠디’가 이처럼 치아건강에 대해 궁금한 내용들을 문답식으로 소개했다. ◆설탕을 많이 먹으면 충치도 늘어날까충치 발생 여부는 얼마나 많은 양의 설탕을 먹었느냐보다 얼마나 오랫동안 치아와 설탕이 접촉해 있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설탕은 치아 법랑질(에나멜)을 부식시키는 산성을 생성하기 때문에 입안에 설탕이 머물러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충치가 생길 확률도 높아진다. 즉 설탕을 많이 먹었다 해도 곧바로 이를 닦는다면 충치가 생길 가능성은 낮아진다. ◆무설탕 탄산음료도 치아를 상하게 할까충치를 일으키는 것은 탄산음료에 든 설탕만이 아니다. 탄산음료는 산도가 높기 때문에 그 자체로 법랑질을 파괴하기 쉽다. 설탕보다 산성이 오히려 치아에 해롭다는 의미다. 일반 탄산음료든 무설탕 탄산음료든 치아 건강을 위해선 마시지 않는 편이 좋다. ◆과일을 먹은 뒤엔 칫솔질을 안 해도 될까당근이나 샐러리 같은 채소는 식이섬유와 수분 함량이 높아 치아 표면을 깨끗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타액 분비량을 늘려 충치와 잇몸병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산을 중화시키는 작용도 한다. 반면 토마토와 감귤류 과일은 건강에는 유익하지만 과즙의 산도가 높은 편이다. 이런 과일을 말려 건과일로 만들면 당도까지 높아져 치아가 상할 확률이 더욱 높아진다. 따라서 과일을 먹고 난 뒤에는 물로 입을 헹궈 산을 제거하고 칫솔질을 해야 한다. ◆치과에서 쓰는 미백제는 효과가 더 강력할까치과에서 사용하는 미백제는 시중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미백치약이나 치아 미백제보다 5~14배 정도 강한 미백 효과를 일으킨다. 치아를 보다 하얗게 만들 뿐 아니라 지속되는 기간 역시 길다는 장점이 있다. 단 그 만큼 비용 역시 더 비싸므로 본인의 치아 상태에 맞는 선택을 해야 한다. ◆칫솔은 얼마나 자주 교체해야 할까칫솔 브러시의 모가 낡아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면 칫솔이 기능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보통 분기마다 교체해주면 되지만 3~4달도 채 못가 모가 닳아빠진다면 좀 더 일찍 교체해야 한다. 만약 한 시즌이 지나도록 칫솔모가 크게 낡지 않는다면 이를 제대로 닦고 있지 않다는 의미일 수 있으므로 칫솔질에 좀 더 신경 써야 한다. ◆치아를 약하게 만드는 질환은 뭘까당뇨는 심각한 잇몸병을 일으킬 수 있다. 잇몸이 약해지면서 치아가 느슨해지고 이로 인해 이가 빠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골다공증이 있어도 턱 부위의 뼈 손실 비율이 높아지면서 이가 흔들린다. 따라서 이 같은 질환이 있는 사람은 치아와 잇몸 관리에 보다 신경 써야 한다. 골다공증이 있는 사람은 칼슘, 비타민 D, 비타민 K 섭취량을 늘리는 편이 좋다. ◆칫솔모는 부드러운 게 좋을까칫솔모가 단단하면 치아 표면을 마모시킬 확률이 높다. 따라서 가급적 부드럽고 유연한 칫솔모를 이용해야 한다. 유연해서 잘 구부러지는 칫솔모는 단단한 칫솔모가 닿기 힘든 부위까지 접근하는데도 용이하다. 더불어 박테리아를 깨끗하게 제거하기 위해선 혓바닥도 반드시 함께 닦아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