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혹과 고통으로 가득 찬 삶이란 게임은 대체 언제 끝날까요? 그것은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그저 하나의 생각임을 확실히 바로 볼 때 끝납니다.

몸과 마음으로 이뤄진 ‘나라는 현상’은 나타나 있지만 사실 그 안에 영원한 나란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나를 영원하게 하기 위해 종교나 수행에 매달립니다. 어떤 종교들은 ‘당신이 어떻게 하면’이라는 조건을 달아 구원을 약속합니다.

하지만 진짜 참나인 당신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미 구원받았으며 영원합니다. 몸과 마음이 아닌 ‘나란 현상’조차 만들어내는 그 이전의 영원한 생명으로서 말입니다.

우리가 아는 나란 그저 생각과 느낌의 복잡한 조합일 뿐입니다. 나란 현상은 꿈과 같으며, 몸과 마음이란 그저 생각·느낌·감정이 합쳐진 일종의 정보 다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정보가 지워질 때 치매란 병이 생겨납니다.

따라서 삶이 허무하다는 느낌은 영원한 진리를 빨리 찾으라는 내면의 몸짓입니다. 생각과 느낌이란 감각 정보 속에서 여전히 ‘나란 현상’을 ‘나’로 여길 때 우리는 치매 한 방에 날아갈 그 허망한 공空의 정보를 지키기 위해 온갖 애를 씁니다.

하지만 허망한 공을 붙잡는 게임에서 이긴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또 이런 삶의 방식으로는 ‘삶이란 게임’을 절대 끝낼 수 없습니다. 이 게임은 그 내용을 이룬 채 끌고 가는 프로그램이 끝나야 합니다. 이 프로그램이 끝나는 것이 바로 나의 환영幻影성을 바로 보는 일입니다.

에고라고 불리는 자아를 없애거나 죽이는 수행을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평화롭게, 다만 끝까지 정밀하게 ‘나라는 현상’을 지켜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체와 객체가 다 이것인 본래의 궁극적인 바탕 자리가 스스로 드러납니다. 가짜는 가짜로서, 진짜는 진짜로서 본래 면목을 고스란히 드러낼 뿐입니다.

마치 영화관 스크린 위에 빛을 비춰 온갖 인물이나 형상 배경들을 만들어내듯이 이것과 저것, 개체와 전체, 경계와 비경계, 존재와 비존재를 투사하는 일체 모든 것들의 본질인 살아 있는 성품과 각성의 자리가 스스로 자각되고 체험되어야 비로소 게임은 끝이 납니다. 드러나는 순간 그것이 만든 일체는 실재성을 잃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인생이란 길고 긴 꿈에서 깨어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화 내용에 심취해 있다가 뒤쪽 영사기에서 나오는 빛을 보고 스크린상의 모든 인물 배경들이 그것이 만들어낸 허상임을 알게 되듯이 때가 되면 삶이란 현실도 이것이 드러나는 순간 그 환영성을 명백히 깨닫고 볼 수 있습니다. 삶이란 것이 다 공하고 우리가 만들어낸 이야기 속의 이미지였음이 확실해지는 것이지요.

정견正見이 그때를 지금으로 만들 때 삶의 모든 게임은 일시에 끝납니다. 그때가 되면 내가 알던 몸을 의지해 살던 나조차 사라지고 다만 이것만이 나란 현상조차 투사하고 있는 진실을 보며 웃음을 터뜨릴 것입니다. “뭐야! 나라는 것조차 전부 다 꿈이었잖아!” 하면서 말입니다.

그때 드러날 생명력이 바로 지금 여기 ‘나란 환영’조차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체도 개체도 아니며, 모든 것이라는 생각·느낌조차도 이것에 의지해 꿈처럼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그냥 뭔지 모를 살아 있는 하나의 생명력이 마치 신神처럼 모든 것을 살려내고 그려내며 스스로 활동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참모습이며 동시에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님의 진면목입니다.

글 | 김연수 한양특허 대표

서울대학교 미대를 다니다가 진리를 얻기 위해 출가했으나 세상으로 돌아와 전문 직업을 구해 변리사가 되었다. 지금은 직원 백 명이 넘는 <한양특허법인>의 대표 변리사로 수십 명의 변리사, 변호사와 함께 글로벌 기업들의 지적재산권 업무를 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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