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불교가 무조건 욕구(욕망)를 거부하고 멀리하라고 가르친다고 여깁니다. 그렇게만 알고 있다면 그것은 오해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욕구를 멀리하란 것이 아니라 욕구가 나의 무분별한 주인이 되지 않도록 서로 좋은 친구 관계를 맺으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욕구가 생겼냐가 아니라, 그 욕구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입니다. 사람은 누구든 자기에게 생겨난 욕구를 다 해소하며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럴 때 관계를 잘 맺은 사람은 욕구 불만족으로 인해 무작정 자신을 비난하거나 고통받지 않습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불만족하더라도 그런 욕구(에너지)를 잘 다루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자연 속에서 욕구만큼 위대한 에너지는 없을 겁니다. 욕구는 원자를 모아 분자를 만들고 별들을 서로 끌어당기게 하며 세포들을 서로 결합해서 유기체로서 생존하게 합니다. 이성 간에 성적으로 끌리게 해서 사랑하고 자녀를 낳게 하기도 합니다.

이 원시적 본능의 욕구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도 강력한 에너지입니다. 하지만 욕구(욕망)가 우리의 주인이 되도록 허용하는 순간 우리는 초조해지고 스스로 불완전함을 인정하게 되며, 원하는 것 앞에서 그것을 얻지 못할까 봐 두려움과 긴장감으로 고통받게 됩니다. 석가는 이것을 갈애渴愛라고 멋지게 한마디로 압축해 묘사했습니다.

우리가 욕구를 잠시 방황하는 친구 대하듯 하면 상황은 전혀 달라집니다. 욕구가 주인일 때는 내가 복종하든 거부하든 해야 하지만, 욕구를 친한 친구가 방문한 것처럼 밝게 깨어서 바라보면 막무가내식 충동을 일단 멈출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모든 게 달라질 수 있는 내적 자유의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합니다.

사실 욕구는 맞서 싸워야 할 적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심신 현상입니다. 하지만 욕구를 바라보는 관점과 다루는 방법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요. 욕구를 저항과 투쟁의 대상이 아닌 친구로서 ‘잘 살펴보며 돌봐주기’ 시작할 때 우리 삶은 결과적으로 욕구와 사이좋게 잘 지내게 됩니다.

물론 보살핀다는 것이 무조건 바람을 다 들어준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좋은 우정은 친구가 스트레스를 가져올 때조차 자상하게 살펴보면서 공감하려고 노력합니다. 결과보다도 과정, 즉 상대의 진정한 행복과 평화를 위해 같이 생각하고 노력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머리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관심과 애정을 충분히 줌으로써 욕구를 깊이 이해하지만 침착하게 끝까지 지켜보며 어린아이 돌보듯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욕구의 본질이 삶의 에너지로서 일어나는 끌림과 같은 자연스러운 충동의 일종임을 알게 됩니다. 이는 마치 야생 동물을 길들이는 과정과 같습니다.

욕구가 일으키는 충동엔 과연 무엇이 있을까요? 그것을 알아보려면 용기 있게 한번 그 속으로 들어가봐야 합니다.

사실 모든 본능 에너지는 순수한데 다만 그것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우리 생각과 관점이 무작정 저항하며 덮어 누르고 싸우거나 또는 반대로 절제 없이 분출하며 자기가 처한 환경에서 갈등이나 편향적 태도를 만들어낼 뿐입니다.

아이들이 밖에서 뛰어놀 때 내 아이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모든 부모에겐 자기 아이가 제일 먼저 눈에 띌 것입니다. 이것이 말하는 진실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는 마음의 자기중심적 이기성과 편향성에 이미 깊이 빠져서 에고심에 단단하게 갇힌 존재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너무 오랜 세월을 나란 심신 중심의 편향되고 왜곡된 심리구조 속에 살아왔습니다. 불교는 그 편향성의 뿌리까지 깊이 들여다보는 정견력을 기름으로써 모든 욕구의 부작용을 해결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흥분했을 때 한 번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상황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잠잠해집니다.

욕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정견력을 길러 그 뿌리까지 철저하게 바라다보면 결국 모든 욕구란 하나의 에너지이며 나름대로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모든 욕구는 심신의 만족과 불편함으로부터 해방을 추구하지만 이를 바로 통찰해보면 그 만족과 해방은 일시적이며, 그것을 해소하려는 언행 역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모든 욕구는 본질적으로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는 한 반드시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본질적이고도 궁극적인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석가는 심신이 가진 삶의 모든 고통을 궁극적·본질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조용히 알아차리면서 끝까지 바라봄, 즉 정견(正見)입니다.

끝까지 바라보면 욕구는 다만 그럴 뿐으로 힘을 잃고 조용하게 존재하거나 사라집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특성, 혹은 진리적 현상성 그 자체만 남게 됩니다.

진리성이 드러난다면 진리이므로 그대로 놔두어도 아무 문제가 없지요. 아프면 아픈 대로, 묶이면 묶인 대로, 막히면 막힌 그대로가 진리일 뿐입니다. 그것을 어찌해야 한다는 습성에서만 벗어나면 이미 있는 그대로의 욕구 상태일 뿐 우리를 어쩌지 못하므로 우리는 자유를 얻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좋은 친구란 상대의 결점을 들춰내서 바꾸는 관계가 아닙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좋은 관계입니다. 욕구를 그렇게 인정하고 받아들여보세요.

발생하면 한 대로, 아니면 아닌 대로 명료하지만 따뜻하게, 정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아프거나 투정 부리는 어린아이를 홀로 놔두지 않고 옆에서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조용히 같이 있어주듯이 말입니다.

그럴 때 모든 욕구는 그 자체의 일시적 충동성과 기복성을 솔직히 드러낼 것입니다. 우리는 침착하고도 따스한 고요 속에서 그것의 생겨남과 사라짐을 지켜보게 될 것입니다.

영하지 않은 일시적인 충동이라면 그렇게 심각하게 저항하거나 어째야만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어차피 육체란 관리 유지가 까다로운 객체이니까요.

누구나 알다시피 까다롭게 투정 부리는 존재를 항시 만족시킬 순 없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관심을 가지면서 스스로 가라앉도록 놔두는 것이지요. 같이 붙들고 뒹굴며 ‘이걸 어쩌지?’ 하는 한 욕구는 절대 물러서지 않습니다.

차분하고 따스한 눈길로 끝까지 바라보며 ‘그래, 너를 이해한다’ 하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욕구와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출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끝없이 칭얼거린다는 점에서 욕구란 하나의 질병과 같습니다. 그 욕구를 제거할 수 없다면 오히려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살아가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글 | 김연수 한양특허 대표

서울대학교 미대를 다니다가 진리를 얻기 위해 출가했으나 세상으로 돌아와 전문 직업을 구해 변리사가 되었다. 지금은 직원 백 명이 넘는 <한양특허법인>의 대표 변리사로 수십 명의 변리사, 변호사와 함께 글로벌 기업들의 지적재산권 업무를 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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