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견(正見)'은 도대체 무얼 말할까요?

우리가 나라고 여기는 심신 현상조차 생각과 느낌의 활동임을 철저하게 보는 것이 정견입니다. 지속적으로 그렇게 보다 보면 어느 순간 홀연히 존재 방식이 거꾸로 뒤집히는 때가 옵니다. 즉 과거엔 내 심신心身이 나였고 무엇을 하더라도 주체 자리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견을 계속하다 보면 문득 나와 내 마음까지 구성하고 있는 더 본질적인 질료랄까 바탕이 확연히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은 온갖 의식조차 나타나고 돌아가는 존재를 유지하는 생명 현상의 보다 근원적인 생명력이자 의식 자리입니다. 이 자리가 드러나면 심신도 여기선 객체이자 대상으로 변환됩니다.

생명 현상이라 해서 죽음에 대비되는 상대 개념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우주조차 창조하고 있게 하는 영원하고 무한한 생명장生命場, 즉 생명의 자리를 말합니다. 탄생과 죽음조차 이 자리 위에서 꿈꾸듯 일어납니다. 마치 거대한 비눗물 속에서 비눗방울 거품이 수없이 생멸하듯이 말입니다.

일례로 풍경화를 보면 그림 속에선 가깝고 먼 풍경이 펼쳐지지만 실제론 다 한 장의 종이(스크린) 위에 존재하는 것처럼, 이 세상과 내 심신 전체를 하나의 입체그림 같은 현상으로 있게 하는 살아 있는 의식으로서의 바탕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선 전체가 다 하나로서 평면사진처럼 펼쳐지고 인식됩니다.

신기한 것은 이 자리 전체가 분리할 수 없이 하나로 살아 있어 나란 심신 현상을 통해 저절로 보고 듣고 느끼며 생각까지 한다는 겁니다. 과거엔 몸과 마음이 하는 줄 알았는데 정견을 통해 문득 이 자리를 보면 확 뒤집히게 됩니다.

정견을 하면 할수록 이 자리가 점점 더 생생해져서 마침내 이 자리가 주체가 되고 나머지는 그 위에 신기루처럼 붕 떠 있는 환상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되어야 진짜 정견 명상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거기까지 가는 데는 꽤 많은 장애들이 나타납니다. 즉 개체 마음이 끝까지 자기가 주체로 남아 이건가 저건가 먼저 찾으려 들고 심지어 묘한 느낌 하나 붙들고 이거라고 고집을 부립니다. 거기에 속아 넘어가면 부산을 가야 하는데 대전이나 평택에서 하차하는 꼴이 됩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항시 자기 안을 바르게 보고 점검해서 생각과 느낌이 미세하게라도 남아 있다면 그것까지 철저하게 쳐내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 본래의 생명의식 자리와 하나가 되는 바른 지름길입니다.

정견을 함에 있어 어느 정도 지나면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본래 자리에 늘 있던 정견의 눈眼이 밝게 빛나며 깨어 있음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 무한 생명의 자리가 전체를 바다처럼 하나로 품으며 일체의 움직임 속에 즉卽하여 같이 수면 위 파도처럼 나타나는 것이 생생하고도 여여하게 보여야 합니다. 이것이 제대로 정견을 하는 방법입니다.

초견성을 했더라도 아직 자기 안에 에고(심신 활동을 나라고 여기는 망상심)가 조금 남아서 마음속이 번잡하거나 알듯 모를 듯 미진하다면 그걸 자기와 동일시하지 말고 그 자체가 망상임을 알고 더 세밀하게 정견을 해나가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치 큰 바위 얼굴이 되어간 어떤 남자처럼 맑고 밝은 생명 의식으로 정화됩니다. 화창한 봄날이나 푸른 가을 하늘처럼 따사로운 생명 에너지를 가득 품은 정신적인 빛처럼 승화됩니다.

단지 정견을 계속할 뿐인데 존재의 본질이 이렇게 정신적인 광명으로 변한다는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글 | 김연수 한양특허 대표

서울대학교 미대를 다니다가 진리를 얻기 위해 출가했으나 세상으로 돌아와 전문 직업을 구해 변리사가 되었다. 지금은 직원 백 명이 넘는 <한양특허법인>의 대표 변리사로 수십 명의 변리사, 변호사와 함께 글로벌 기업들의 지적재산권 업무를 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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