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당신은 방이나 사무실 같은 장소를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당신이 생각하는 ‘이곳’의 이름이지 이곳은 아닙니다. 당신은 자신을 몸이라고 가정한 느낌을 토대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곳’이란 대체 무엇입니까? ‘방’이나 ‘사무실’이란 생각(이름)조차 이곳에서 저절로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리고 의식 활동이라고 할 ‘뭔가’가 ‘이곳’에 방이나 사무실이란 생각을 이름으로 붙이는 작업을 하는 자리가 아닙니까? 그 ‘뭔가’와 ‘이곳’이 다른 것인가요, 아니면 같은 것인가요?

가만히 생각을 멈추고 보면 그 둘은 같은 곳에 있는 움직임일 뿐입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그 ‘뭔가’만을 알려고 정신없이 쫓아다녔습니다. 하지만 그 ‘뭔가’는 항상 ‘이곳’에서 나타나 활동하고 생각·감정·느낌으로 끝없이 창조 작업을 하며 밤에는 사라집니다.

나라는 생각 역시 그 ‘뭔가’가 자주 만들어 쓰는 이 몸에 대한 이름, 꼬리표(생각)일 뿐입니다. 그 ‘뭔가’를 알거나 붙잡으려는 시도를 다 쉬면 나라는 생각이 있든 없든 그냥 ‘이곳’만이 고요한 침묵 속에 홀로 남아있습니다.

간밤에 깊은 잠을 잘 때도 당신은 나라는 생각은 없었지만 ‘이곳’에 있었습니다. 나는 아침이 되면 ‘이곳’에서 의식(마음)으로 솟아 나오고, 밤이 되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가 일체를 쉽니다. 우리가 그토록 나라고 여겼던 ‘뭔가’조차도 말입니다.

즉, 그 ‘뭔가’보다도 먼저 존재하는 근원적인 것이 바로 ‘이곳’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곳’에 대해 본격적으로 탐구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가만히 보면 ‘이곳’은 위치나 크기도 좁혀 잡을 수 없이 무한하지만 그렇다고 추상적이지도 않은 채 일체를 보고 알며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곳’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책을 보며 살아 있습니다. 내 삶의 모든 일은 다 ‘이곳’에서 일어났으며 지금도 그렇습니다.

인생이란 ‘이곳’을 스크린 삼아 펼쳐지고 지나가는 그림자 동영상 같은 오온(생각·감정·느낌)의 재료로 찍은 영화 필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오온을 활용해서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고 그 속에서 희로애락을 체험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한시도 머무르지 않고 끝없이 행진하며 나를 지나가 사라져버립니다.

깨어나려면 항상 지금 ‘이곳’에서 ‘이곳’으로 있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이곳’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날 것입니다.

당신이 바로 ‘이곳’ 그 자체입니다. 지금 ‘이곳’에 있지 않고 생각·감정·느낌에 빠져 무언가를 찾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무명無明이며 전도몽상이란 꿈을 꾸는 상태인 것입니다.

글 | 김연수 한양특허 대표

서울대학교 미대를 다니다가 진리를 얻기 위해 출가했으나 세상으로 돌아와 전문 직업을 구해 변리사가 되었다. 지금은 직원 백 명이 넘는 <한양특허법인>의 대표 변리사로 수십 명의 변리사, 변호사와 함께 글로벌 기업들의 지적재산권 업무를 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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