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결코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에 온갖 그럴듯한 이름을 다 붙여놓고는 그에 대해 이제 스스로 많이 알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 부처님, 진리, 참나, 불성, 하늘나라, 진여, 신성이 그런 것들입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현대인들의 눈 가리기식 언행을 비판했습니다. 사실 그런 말들은 어디까지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 달은 아닙니다. 눈을 들어 달을 바라보고 감상하며 체험하는 것은 각자의 몫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머릿속 정보로 ‘알면 됐다’ 하며 직접 가슴으로 하는 체험은 잊어버린 지가 오래입니다.

이 생각 중독이 너무나 지독해서 깨달음에 해오解悟란 말까지 생겼습니다. 하지만 사랑이나 생명처럼 반드시 체험해봐야만 아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머리로만 다룰 때 우리는 그가 ‘인간성을 상실’했다고 합니다.

인간성을 상실했다는 것은 컴퓨터 기계처럼 프로그램일 뿐이란 말입니다. 더 이상 그로부터 숨 쉬는 사람 냄새가 그다지 나지 않는다는 말이기 도 합니다.

당신은 어떤가요? 행여 이 경이롭고 눈부신 삶, 존재함에 대해 어제와 같은 천편일률적인 프로그램의 마음으로 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당신은 결코 이름 붙일 수 없는 생명의 지금 이 순간 속으로 얼마나 깊이 스스로 자맥질하며 들어가 보았습니까?

오늘날 그런 사람은 너무나 드뭅니다. 대부분은 경전의 얘기를 읊조리며 자기가 마치 진리를 항상 체험하고 기억하며 따르는 사람인 양 자아도취감 속에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런 사회는 죽은 시인의 관념적 단어만 난무하는 곳일 뿐입니다.

우리 영혼을 진정 살려내려면 지금 여기 살아 있는 사실fact로 넘실거리는 경이롭고 신비한 차원 속으로 과감하게 뛰어 들어가야 합니다. 처음부터 죽은 관념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이 생명의 바다 속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결코 이름 붙일 수 없는 것(곳)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모를 뿐이라 합니다. 그것은 모든 체험조차 있게 하는 것(곳)이라 어떤 체험으로도 상징하거나 대표성을 띨 수 없는 미지의 불가사의한 자리입니다.

우리는 그것의 이름을 영원한 생명 혹은 하나님, 부처님이라 부르며 아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교회와 사찰에서는 말과 생각으로 진리를 다 아는 양 분석하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는 생각 말고 더 이상 무엇을 아는 것입니까? 마치 아직 여행을 떠나지 않았으면서 지도를 갖다놓고 온갖 여행지의 이름을 부르며 그곳에 가 있는 듯한 착각을 하는 건 아닐까요?

그렇게 하면서 스스로 안심하는 것은 에고가 가진 생각일 뿐입니다. 실제 영혼은 아직 그것과 만나지 못했으며 그런 까닭에 이 짓을 반복하고 암송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무언가 부족한 듯한 착각을 갖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과 만나거나 그곳에 간 자는 말이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침묵 속에서 조용히 자기가 그것임을 보여주고 앞서 실천할 뿐. 우리는 지금 심각한 ‘안다병’에 걸려 있지만 그 진실 자체를 모릅니다. “난 이것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그러니까 난 다 끝난 거야!”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결코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태초부터 그러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실로 그것을 만나는 길은 모든 관념과 생각을 정지하고 이 순간 나란 현상은 오직 의식 활동의 결과일 뿐이니 이 의식은 과연 어디서 오는가부터 깊이 성찰해보는 것입니다.

진리는 머리로 아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사랑·평화·환희·감동·은총·공감·공명·우정· 자각 같은 것들은 그 깊이를 말과 생각으로는 도저히 재거나 온전히 다 표현해 전할 수 없습니다. 사랑에 대한 말을 백만 번 읽고 듣는 것보다 직접 체험하는 게 더 낫듯이.

글 | 김연수 한양특허 대표

서울대학교 미대를 다니다가 진리를 얻기 위해 출가했으나 세상으로 돌아와 전문 직업을 구해 변리사가 되었다. 지금은 직원 백 명이 넘는 <한양특허법인>의 대표 변리사로 수십 명의 변리사, 변호사와 함께 글로벌 기업들의 지적재산권 업무를 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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