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꿀 때 우리는 그 꿈속 세상과 관계 안에 단단히 갇혀 있습니다. 모두 내 마음이 창조하고 벌이는 해프닝이지만 우리는 그걸 깨어날 때까지는 실재라고 믿습니다.

꿈속에서는 평소 내가 상대에 대해 가졌던 잠재의식이 발현되어 다양한 사건들이 펼쳐집니다. 때로는 좋은 내용도 있지만 그래봐야 깨어나면 아쉽고 허망한 꿈일 뿐입니다.

또 두렵고 힘든 꿈도 꾸지만 그 역시 깨어나서 보면 나 스스로가 만든 환영임을 알고 한숨을 쉬거나 위안을 삼기도 합니다.

그런데 현실이라고 꿈과 다를까요? 우리 잠재업습이 눈앞의 세상을 창조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그래서 현실도 내 마음이 만들어가는 또 하나의 꿈 세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꿈꿀 때 그게 꿈인 줄 알면(그런 꿈을 자각몽이라 함) 오히려 꿈을 즐기거나 중간에 내 의지대로 깨버릴 수도 있습니다. 꿈의 내용에 끌려 다니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자각몽을 꾸는 것처럼 현실에서 이것이 내 마음이 그렇게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일 뿐이란 사실에 항상 깨어 있는 것을 해탈解脫이라고 합니다. 부처란 다른 게 아니라 견성해서 삶의 고통을 모두 없애버린 존재라는 말입니다. 언제 무슨 일이 있든 항상 상락아정常樂我淨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 비결은 내 안에 더 이상 나라고 할 것이 남지 않아서 삶의 모든 고통과 번뇌가 본래 공하며 실체가 없는 것이란 진실에 늘 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게 아니라 고통·번뇌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받을 내가 정말로 없어진 것입니다.

그렇다고 누가 때리는데 안 아프다거나 무거운데 힘들지 않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아프지만 그 아픈 현상만 있을 뿐 아픔을 받는 내가 없고, 무겁지만 그냥 그러할 뿐 그것을 무겁다고 불평하거나 짜증 내는 개인의 주관적 마음 현상이 없습니다.

그냥 보고 듣고 느끼는 현상은 그대로인데 그에 반응하는 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체가 다 허망한 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허망한 환영이 일어나는 존재의 본질적 실재인 생명의식 자리와 합일했기 때문입니다. 개체의 심신 현상이 일어나기 이전인 본래의 생명력 자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도망치거나 떠나버린 것은 아닙니다. 당당하게 현실을 비추며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만 현실에 반응하며 좋다 싫다 하던 주관적 분별의식이 허망한 환영임을 보고 있기에 더 이상 모든 심리적 공포와 해석에 영향받지 않고 자유롭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생각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철저한 정견을 통해 스스로 법력이 생겨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법력이란 고통과 스트레스를 인내하며 정견을 계속할 때 자연히 드러나는 내면의 힘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생명의 실상에 대한 깨달음과 내공 법력이 생겨납니다.

깨어남이 마음의 법력을 가져오고, 법력은 다시 깨달음을 분명하게 심화시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중생에서 부처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부처란 달리 말하면 하나님 자리입니다. 내 안에 하늘나라가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있다는 뜻이요, 그 자리는 곧 길이요 진리이자 생명의식입니다.

우주조차도 이 자리에서 나왔으니 생명이 나나 세상보다 항상 먼저입니다. 이 자리를 발견하고 하나 됨으로써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도 세상 이전과 이후에 늘 여여하게 초월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견성 해탈로 드러나는 자리이며 동시에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참으로 구원받는 것이니 사람으로 태어나 이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글 | 김연수 한양특허 대표

서울대학교 미대를 다니다가 진리를 얻기 위해 출가했으나 세상으로 돌아와 전문 직업을 구해 변리사가 되었다. 지금은 직원 백 명이 넘는 <한양특허법인>의 대표 변리사로 수십 명의 변리사, 변호사와 함께 글로벌 기업들의 지적재산권 업무를 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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