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후배 박교수가 있다. 판사출신 변호사인 그는 다양한 방송 활동도 하고 있다. 한번은 그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출연을 하고 나와서 방송국 대기실에서 차를 한 잔 하고 있는데 담당피디가 날 보고 마침 대통령 후보인 지사님이 오셨으니 합석을 하는 게 어떠냐고 하는 거예요. 그 양반 변호사출신이니까 당연히 나하고 잘 아는걸로 인식하는 거예요.

그 때 밖이 어수선해지더니 대통령 후보인 지사가 보좌진하고 왁자지껄하게 들어오는 거예요. 피디가 박교수님입니다 모르세요?하니까 처음 보는 그가 ‘야 박 교수 정말 오랜만이다. 우리 사진이나 한 장 찍자’ 하고 어깨를 껴안는 거예요.

 

사진을 찍고 나서는 비서에게 ‘이거 액자까지 잘 만들어 보내드려’하는 겁니다. 처음 본 사람이지만 그 자리에서 다른 소리를 할 수도 없고 해서 가만있었죠. 그런데 보름이 지나도 사진이 오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도지사실에 전화를 걸었죠. 비서가 받았는데 기억조차 못하고 있었어요.”

그 대통령 후보는 모른 척 하면 실수할까봐 그렇게 행동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워낙 많은 사람을 만나니까 기억에는 한계가 있을 게 분명했다. 세상에는 친구가 많은 것을 자랑거리로 삼는 사람들이 많다. 정치인들이 그중 하나일 것이다.

나는 정치인들이 친한 척해도 믿지 않는다. 인간인 그들의 우정의 분량은 한정되어 있다. 친구라고 불리워도 그들이 아는 사람 총수의 엔분의 일에 해당하는 나 한 사람이 받는 우정의 분량은 물 한방울도 안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으려다가 아무의 사랑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무나 사랑하는 사람은 또한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옛날 그리스의 한 철학자는 겨우 여섯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집을 지어 이웃에게 웃음거리가 됐다.

그때 그는 그 집에 초대할 정도만이라도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우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인 것 같다.

내가 다니던 교회는 십만명의 교인을 자랑하고 있었다. 당회장이라고 불리는 목사는 거의 연예인 수준으로 인기가 높았다. 그런 교회에서 분규가 일어나고 교계의 거물인 목사가 내게 도움을 청했었다.

 

나는 그 목사에게 십만명이 넘는 교인중에서 진짜 친구 다섯명만 지정해 보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알려주는 그의 친구는 세 명이 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도 진짜 친구가 아닌 것 같았다.

화려한 세상을 살다가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지 알 수가 있다. 초창기에 인사치레로 찾아오는 사람들은 있어도 끝까지 생각해 주는 친구들은 거의 없었다.

내가 아는 입지전적인 재벌 회장이 있었다. 가난한 학원 강사로 출발한 그는 학습지 등의 개발로 부자가 됐다. 그는 자신에게서 밥을 벌어먹는 사람들을 친구로 생각했다. 손해가 나더라도 그들을 위했다. 그의 친구들이 그를 신같이 떠받들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사기범이 되어 버렸다.

무너지는 모래성같이 친구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에게 중형이 선고됐다. 그가 십여년 징역을 살 무렵 그가 있는 어둠침침한 감옥으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단 한 명의 친구도 없었다. 그는 까뮤의 이방인에 나오는 감옥 속의 주인공처럼 절대고독 속에 있었다. 그런 게 내가 본 세상의 모습이었다.

 

변호사는 철학을 하는 직업인 것 같기도 했다. 세상의 이면에 있는 고독의 그림자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가끔 스스로에게 질문을 한다.

내가 혼자 살다가 갑자기 아플 때 구원요청을 할 진정한 친구가 있을까. 나를 병원에 데리고 가고 진정으로 걱정을 하면서 간호를 해 줄 친구가 있을까. 바쁜 세상에서 며칠간만이라도 내게 신경을 써 줄 수 있을까. 선이 분명한 그런 친구는 없을 것 같았다.

반대로 내가 그렇게 해 보려고 시도해 봤다. 감옥에 있거나 요양병원에 있는 친구를 찾아가고 약간의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그런 관심도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금세 색이 바랬다.

그런 반짝 애정에 내가 얼마나 얕은 사람인지를 알았다. 학연이나 지연으로 얼굴을 안다고 친구가 아니다. 관념이나 사상을 같이 하는 동지도 친구가 아니다. 그때 그때 하나님이 보내주는 진짜 친구를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글 | 엄상익 변호사

경기중-고, 고려대 법대를 나오고 제24회 사법시험(1982)에 합격했다. 6공 때, 국정원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 특별보좌관실에 근무하며 권부의 이면을 보았다. 변호사를 하면서 ‘대도 조세형’, ‘탈주범 신창원’ 등 사회 이목을 끌은 대형사건 피의자들을 변호했다. 글쓰기를 좋아해 월간조선을 비롯, 조선-중앙-동아일보 등에 칼럼을 연재했고 수필집, 장편 소설 등 1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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