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YTN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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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대 초반 변호사로 처음 시작할 때였다. 오십대 쯤의 한 여성이 내게 와서 사건을 맡겼다. 나는 성실히 사건을 처리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내가 있는 작은 빌딩의 경비를 맡은 아저씨가 내게 와서 조심스럽게 이런 말을 했다.

“변호사님한테 사건을 맡겼다는 어떤 아주머니가 매일 와서 끈질기게 변호사님에 대해 물어요. 학교는 어디 나왔느냐 경력은 어떠냐 인간성이 어떠냐 성실하냐를 꼬치꼬치 물어요. 어제도 경비실에 와서 한 시간이나 있다가 갔어요.”

나의 마음이 순간 냉냉 하게 식는 것 같았다. 그녀는 모든 사람과 사물을 의심의 눈으로 봤다. 사람들은 모두 위선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남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반드시 그 뒤를 캐는 버릇이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경비원에게 변호사인 내가 머리가 좋으냐 나쁘냐도 물었다고 했다. 내가 인심을 잃지 않는한 경비원이 내 편일 수 있다고 생각을 못한 것 같다. 그녀를 보면서 변호사인 나는 무엇을 파는 사람인가 생각해 봤다.

믿음을 파는 사람이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성실해야 하고 신의를 지켜야 했다. 그게 변호사가 제공하는 서비스였다. 상대방이 의심을 하면서 캐면 더 이상 신뢰 관계는 존재할 수 없었다.

모든게 상대적이다. 변호사인 나도 상대방을 더 이상 믿을 수 없었다. 불신하는 상대방에게 사랑이 갈 수가 없는 것이다. 변호사는 자기의 의뢰인을 사랑해야만 변호를 할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있었다. 나는 그 사건을 그만두었다.

사십대 초반쯤이었다. 한 여성이 이혼 사건을 맡겼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남편의 모습은 악마 그 자체였다. 법정에 나가 상대편의 주장을 들어보면서 내 인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여성은 내 머릿속에 철저히 거짓을 입력시키려고 했다.

심지어는 드라마에서 본 악랄한 장면의 주인공을 남편으로 해서 내게 스토리를 집어넣기도 했다. 그녀는 내게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말했다. 기독교 서적을 선물로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내가 자기 뜻대로 로봇이 되어주지 않자 나를 배임죄로 고소했다.

그녀의 적인 남편과 내통해서 돈을 받고 자기에게 불리하게 재판을 진행했다는 내용이었다. 세상은 항상 예상과 달랐다. 검사실에서 내가 겪은 수모는 치욕적이었다. 어떤 분야든 서로 모르더라도 같은 직종이면 약간의 예의는 취하는 법이다.

건달 세계도 모르는 선배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한다. 사건을 담당한 검사는 나보다 이십년 가까이 어린 법조계 후배이기도 했다. 그는 내가 검사실로 들어서자마자 “대기실에 가서 기다리다 부르면 와요”라고 소리쳤다.

보통 그렇게는 안 했다. 대기실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바빠서 그런 게 아닌 눈치였다. 검사실에서의 대기는 일종의 변형된 고통이었다. 이윽고 검사책상 앞 접이식 철 의자에 나를 고소한 그녀와 나란히 앉아 대질신문을 받았다.

모순점을 노출시켜 진실을 알기 위한 대질이 아닌 것 같았다. 검사는 그녀가 일방적으로 나를 욕하게 하면서 당하는 나의 반응을 즐기고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마지막에 검사는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남편을 불러 철저히 조사할 겁니다. 내통을 했는지 안 했는지. 참 그리고 한마디 덧붙이겠는데요. 엄변호사님이 종종 신문 컬럼에 우리 검찰을 공격했다고 해서 내가 이렇게 하는 건 아닙니다.”

조사를 가장한 그의 내면에 어떤 게 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이제 글쟁이란 별명도 얻은 나의 업보라고 생각했다.

나보다 그들의 불신병도 문제인 것 같았다. 그들은 하나님도 사람도 믿지 않았다. 자기도 믿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순수한 선의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순수한 선의의 배후에는 반드시 어떤 욕심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그들의 일생은 회의의 일생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을 의심하고 친구를 의심하고 이웃을 의심하고 자기를 의심하고 그러다가 일생을 마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들은 모든 사람과 사물을 의심함으로써 즐거워야 할 일생을 지옥의 생애로 만들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믿음이 없는 곳은 지옥이다.

글 | 엄상익 변호사

경기중-고, 고려대 법대를 나오고 제24회 사법시험(1982)에 합격했다. 6공 때, 국정원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 특별보좌관실에 근무하며 권부의 이면을 보았다. 변호사를 하면서 ‘대도 조세형’, ‘탈주범 신창원’ 등 사회 이목을 끌은 대형사건 피의자들을 변호했다. 글쓰기를 좋아해 월간조선을 비롯, 조선-중앙-동아일보 등에 칼럼을 연재했고 수필집, 장편 소설 등 1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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