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도 대학을 가기 위해 비싼 고급과외가 있었다. 그런 과외를 하는 같은 반 아이에게 내가 사정을 했다.

“그 과외에서 공부하는 자료만 좀 얻을 수 없을까?”

속칭 족집게 과외를 한다는 아이들의 자료에는 대학시험에서 출제 될 가능성이 많은 문제나 영어지문이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내 말을 들은 그 아이가 순간 불쾌한 표정이 되면서 입을 열었다.

 

“우리 부모가 비싼 돈을 들인 과외의 자료들을 내가 왜 너한테 거저 주어야 하지? 다 똑같으면 특별과외의 의미가 없잖아?”

야속하지만 그 아이의 말이 맞았다. 내가 얌체 같은 말을 한 것이다. 같은 반에 있고 안면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 친구도 아닌 것이다. 그동안 공부를 등한시 했었다. 수학 시간에 선생이 가르치는 것들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치 외국인이 하는 모르는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집안 형편을 아는 나는 과외를 시켜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오히려 내가 일주일에 한 두번씩 초등학교 아이들 몇 명을 가르쳐서 돈을 버는 입장이었다. 그래도 뭔가 방안을 강구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같은 반에서 특히 수학이 뛰어난 아이가 있었다. 친하지는 않았지만 온유한 성격이었다. 그 아이에게 가서 말했다.

 

“미안하지만 네가 알 듯이 내가 워낙 실력이 없어서 그러는데 나한테 수학을 좀 가르쳐주지 않겠니? 내가 과외를 할 형편이 안되서 그래.”

그 아이는 잠시 심각하게 생각하는 표정이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알았어. 그러면 오늘부터 학교수업이 끝난 후 우리 집에 가자. 내 방에서 같이 공부하는 게 편할거야.”

 

그날 오후 나는 부자들이 많이 산다는 혜화동에 있는 그 아이의 집으로 갔다. 그 집은 넓은 파란 잔디밭이 있는 석조 이층의 저택이었다. 가까이 있는 낙산에는 판자집들이 굴껍질처럼 붙어있던 가난한 시절이었다.

그 아이는 매일같이 나를 집으로 데려가 수학을 가르쳐주었다. 내일 중요한 시험이 있어도 그 아이의 우선순위는 나를 가르치는 게 먼저였다. 저녁때가 되면 그 집 식당에서 가정부가 차려놓은 밥을 함께 먹었다. 집에서 김치국만 먹던 내게 반찬으로 접시위에 올려진 불고기는 정말 맛이 있었다.

그 아이는 타고난 선생인 것 같았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지를 말없이 관찰하고 아니다 싶으면 설명을 반복했다. 자기 나름대로 수학의 원리가 내 머릿속에 배어들도록 방안을 강구하는 것 같았다. 고마웠다. 그 덕분인지 대학입시에서 나는 수학문제를 거의 다 풀었다. 대충 백점 가깝게 맞았다.

 

세월이 흘렀다. 뒤늦게야 내게 수학을 가르쳐준 그 아이의 아버지가 한국에서 전설적인 부자인 걸 알았다. 초창기 삼성그룹이나 두산그룹의 창업자들이 모두 그 아이 아버지의 돈을 빌려 썼다고 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한국의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자기 돈으로 백점 가까운 고려청자를 사서 보관하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내게 수학을 가르쳐 줬던 그 아이는 미국의 MIT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대학교에서 수학을 강의하는 교수가 됐다.

어머니는 내게 형편이 같지 않은 사람은 친구가 되기 힘들다고 가르치곤 했다. 그런 어머니의 교육 탓인지 내 쪽에서 그 친구와 거리를 두었다. 그는 나와 너무 차이가 나는 부자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따금씩 연락을 했다. 세상이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으로 가득 찬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삼십대 중반쯤의 어느 해 미국에 갔을 때였다. 그곳에 살던 고교동창이 암으로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젊은 아내와 이제 자라나는 아이를 두고 떠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직장에서도 한창 잘 나가는 순간 죽음의 초대장이 왔다는 것이다. 그 친구에 대한 아련한 기억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시절 과외 자료를 얻으려고 할 때 냉정한 표정으로 차디차게 거절하던 친구였다. 내게는 돈없는 설움이자 상처이기도 했었다. 경주마 같이 한발 먼저 앞서가려고 해도 인간은 운명의 섭리 속에서 어찌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분이 부르시면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꽃을 주문해서 그의 병실에 보냈다. 그 얼마 후 그가 고맙다는 소식과 함께 미안하다는 말이 전해져 왔다. 세월의 강이 흘러 나는 폭이 넓은 하류까지 흘러왔다.

이기주의적인 나는 친구가 아주 적다. 그 친구 몇 명도 거의 만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하나님이 주신 보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무정한 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다.

글 | 엄상익 변호사

경기중-고, 고려대 법대를 나오고 제24회 사법시험(1982)에 합격했다. 6공 때, 국정원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 특별보좌관실에 근무하며 권부의 이면을 보았다. 변호사를 하면서 ‘대도 조세형’, ‘탈주범 신창원’ 등 사회 이목을 끌은 대형사건 피의자들을 변호했다. 글쓰기를 좋아해 월간조선을 비롯, 조선-중앙-동아일보 등에 칼럼을 연재했고 수필집, 장편 소설 등 1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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