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로 허리가 꼬부라진 칠십대쯤의 노파가 지팡이를 짚고 다리를 끌면서 들어왔다. 눈꺼풀이 덮힌 눈가엔 마른 눈꼽이 끼어 있었다. 노파가 책상 앞에 서서 말했다.

“동사무소에서 돈 줘서 먹고 사는 사람이유. 동생이 곡식을 훔쳐서 변호사님을 찾아 왔슈.”

쇳소리가 섞인 거친 목소리였다. 사회의 바닥에서 허우적 대는 늙고 가난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참 많았다. 이런 때 나는 위선자가 되고 머리와 마음은 따로 논다.

머리로는 성경말씀처럼 사람을 사랑해야 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 내게 이익이 되지 않는 사람은 피하고 싶다. 그럴 때면 톨스토이소설의 한 장면이 가시처럼 내 마음을 찌른다.

추운 겨울날 천사가 벌거벗은 청년의 모습으로 길가에서 떨고 있었다. 천사는 멀리서 자기쪽을 향해 오는 행인을 의식하고 있었다. 행인이 그냥 지나치면 죽음으로 이끌고 사랑을 베풀면 보답을 하려고 마음먹고 있다.

소설 속의 행인이던 주인공은 벌거벗은 천사를 무심히 지나쳤다가 아차 하고 후회하고 되돌아서 그 천사를 데리고 집으로 갔다. 나는 언제 어떤 모습으로 그분이 보낸 천사가 올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의자를 권하고 내 앞에 있는 노파를 찬찬히 봤다. 누런 이빨이 몇 개 빠져 검은 구멍을 이루고 있었다. 그 뒤쪽에 붉은 잇몸이 보였다.

“어떤 일로 오셨어요?”

내가 노파에게 물었다.

“갸가 일을 저지른 게 다 나 때문에 그런 거유. 내가 간암이라 제 누이 병원이라도 한번 가게 할라구 도둑질을 했을 거유.”

동생이 절도범으로 구속이 된 것 같았다. 자세한 건 동생을 만나봐야 알 것 같았다. 행색을 보면 돈을 받기는 틀린 것 같았다. 노파는 사무실 바닥을 보면서 자기 할 말만 하고 있었다.

“시골에서 아버지가 죽자 엄마는 우리 남매를 데리고 일흔살이 넘는 거지노인에게 시집을 갔슈. 거지노인이 얻어오는 곡식으로 연명을 했쥬. 거지노인은 이른 새벽이 되면 꿰맨 고무신을 신고 동냥을 나갔슈. 해가 질 무렵이면 우리 남매는 마을 앞 묘지 쪽으로 거지아버지 마중을 갔슈. 피곤에 쩔어 휘청거리며 돌아오는 거지 노인에게 달려가 동냥자루를 받아들곤 했쥬.”

거지 노인의 사랑이 마음을 눅눅하게 하는 것 같았다. 처음과는 달리 뭔가가 속에서 내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혹시 천사가 이런 모습으로 저한테 오신 건 아니죠?”

내가 노파를 보면서 말했다. 나는 천사나 악마가 인간의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둘 다 영적인 존재다. 인간 속에 들어가 나에게 올 수도 있었다.

“뭔 말이유?”

노파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노파의 뒤 허공을 살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혹시 예수가 그 노파의 뒤에 서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며칠 후 감옥에 있는 노파의 동생을 찾아갔다. 고추도둑이었다. 남의 집에 들어가 쌀가마를 가지고 나온 전과도 있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저는 황혼이 내리면 마을어귀 묘지있는데 까지 거지 아버지 마중을 갔어요. 동냥자루에 보리쌀이 두되 있으면 그날은 정말 운수 좋은 날이었죠. 거지 아버지의 찢어진 고무신 속에서 진종일 걸어다니느라고 부르튼 발가락을 보면 마음이 찡했어요.

저는 언젠가는 광에 곡식을 가득 채운 부자가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인지 시골길을 가다가 포개져 있는 쌀가마나 널어 말리는 고추만 보면 들고 갔다니까요. 그렇게 도둑이 된 거죠. 저는 거지였기 때문에 어떤 것도 견딜 수 있어요. 그런데 곡식 욕심 때문에 ”

나는 그 남매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거지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믿는 그분의 계명은 간단하다.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굳이 산속에 가서 하나님이 나오시라고 소리칠 필요가 있을까? 보이지 않는 그분을 사랑한다면 보이는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꼭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갈 필요없이 사람들 하나하나가 성전이다.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 분을 기쁘게 한다. 예배나 의식이 아니다. 배의 중심을 잡는 바닥짐이 있듯이 나는 마음의 중심에 사랑 자체인 그분을 모시려고 노력해 왔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자리에 금송아지가 들어와 서기 때문이다.

글 | 엄상익 변호사

경기중-고, 고려대 법대를 나오고 제24회 사법시험(1982)에 합격했다. 6공 때, 국정원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 특별보좌관실에 근무하며 권부의 이면을 보았다. 변호사를 하면서 ‘대도 조세형’, ‘탈주범 신창원’ 등 사회 이목을 끌은 대형사건 피의자들을 변호했다. 글쓰기를 좋아해 월간조선을 비롯, 조선-중앙-동아일보 등에 칼럼을 연재했고 수필집, 장편 소설 등 1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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