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위에 떨어진 십일월의 낙엽들이 비를 맞고 축축했다. 나는 서초동의 법원 정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마스크를 쓴 작달막한 남자가 옆에 있는 사람과 얘기를 하면서 지나가는 모습이 언뜻 보였다. 선배 변호사였다.

그가 아직도 활동한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노인인데도 그는 법정을 드나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한때 정치의 중심이라고 하는 종로구 국회의원이었다. 에너지와 야망이 대단해 보였었다. 그가 아직도 변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아마도 그의 천직은 변호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재인 대통령도 자리에서 물러난 후 다시 평범한 변호사가 되어 활동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에겐 각자 천직이 있다. 그걸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

 

덜 익었던 젊은시절 나는 변호사라는 직업에 불만을 느낀 적이 있었다. 법정의 화려한 주인공은 판사였다. 붉은 의자 등받이를 배경으로 검은 법복을 입은 모습은 왕 같았다. 내 역할은 초라한 조역 같았다.

더러 왕 역할 같은 판사에게 혼이 날 때면 자존감이 약한 나는 주눅이 들면서 내가 한없이 초라해지는 것 같았다. 그들보다 성적이 못했던 나는 열등의식을 느끼기도 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의 시각과 의식이 조금씩 달라졌다.

성경을 보면 그 분은 하나의 진흙 덩어리에서 천하게 쓰이는 그릇을 만들 수도 있다고 했다. 도자기가 되지 못하고 나는 막사발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매트릭스 안 같은 인생 무대의 연출자인 그분은 나를 단역이나 엑스트라로 만들 수도 있었다.

 

그걸 조금씩 받아들이니까 편해지기 시작했다. 보지 못했던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영화를 보면 정말 맛깔스럽게 조연 역할을 잘해 내는 배우들이 있었다. 자기의 역할에 만족하고 최선을 다하는 그들을 보면 박수를 쳐 주고 싶었다. 조역은 그들의 훌륭한 천직 같았다.

그동안 천직을 엉뚱하게 생각해 왔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리듯 어떤 계시가 있을 것 같았다. 또 깊이 사색을 하면 나의 천직을 발견할 것 같기도 했다. 내가 해왔던 변호사라는 직업은 처음부터 원한 것은 아니었다. 몇 차례나 물리치고 좀 더 화려해 보이는 다른 직업을 가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그 분은 억지로 나를 지금의 이 일로 밀어 넣으셨다.

지나고 보니까 여태까지 내가 해 왔던 일이 내게 맡겨 진 천직이었던 것을 비로서 깨닫는다. 어제도 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법정에 들어섰다. 남들은 일하고 싶은데도 나이라는 사회적 제약 때문에 일하지 못한다. 아직도 일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고마움이었다.

 

나는 한 장애 여성의 억울한 사정을 가지고 법정에 섰었다. 젊은 여성 재판장이 그녀의 힘든 삶을 서면에 생동감 있게 써서 제출해 달라고 했다. 나는 그녀의 슬픔을 어떻게 아름다운 단편소설같은 작품으로 만들어 볼까 행복한 고민을 하면서 법정을 나온다.

천직은 별 게 아니다. 내가 익숙하게 잘 할 수 있는 일이다. 뒤늦게 천직을 발견한 친구가 있다. 어려서부터 친한 빵집 아들이 있다. 그 친구는 광고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 그는 국회의원이 되려고 대통령 후보를 초청해 가든파티도 성대하게 열었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앙꼬’의 명인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제자로 받아달라고 했다. 그렇게 그는 ‘앙꼬’를 만드는 장인이 됐다. 돌아와서 그는 뒷골목에 예쁜 제과점을 차렸다. 늦은 밤 그가 혼자 팥을 깨끗한 물에 씻고 솥에서 끓이고 체를 쳐서 고운 앙금을 만드는 걸 봤다. 그는 최고급 밀가루로 반죽을 하면서 자기의 천직은 바로 그것이었다고 내게 고백했다.

어려서부터 천직을 발견하고 일생 흐트러짐 없이 그 길을 가고 있는 사람도 있다. 내가 지금 신고 다니는 수제화는 바로 그 성수동의 구두장이가 만든 것이다.

 

그는 대형 공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기계제품들 때문에 기술자들이 구두방을 떠날 때도 그는 시장 귀퉁이에서 구두만 만들었다고 했다. 가격을 스스로 반으로 내리고 버텼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는 천직이 구두장이라는 것이다.

그는 두 번이나 우리 집으로 와서 제조 중인 수제화를 내게 신겨보고 이리저리 살폈다. 말은 안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그는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를 실천하는 것 같았다. 일찍부터 천직으로 가면 만족과 세상에 태어난 보람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글 | 엄상익 변호사

경기중-고, 고려대 법대를 나오고 제24회 사법시험(1982)에 합격했다. 6공 때, 국정원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 특별보좌관실에 근무하며 권부의 이면을 보았다. 변호사를 하면서 ‘대도 조세형’, ‘탈주범 신창원’ 등 사회 이목을 끌은 대형사건 피의자들을 변호했다. 글쓰기를 좋아해 월간조선을 비롯, 조선-중앙-동아일보 등에 칼럼을 연재했고 수필집, 장편 소설 등 1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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