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KBS 뉴스 캡쳐
*사진= KBS 뉴스 캡쳐

삼십여년 전 한 작은 잡지에 고정칼럼을 썼던 적이 있었다. 회사를 다니던 사람이 퇴직을 하고 그의 일생을 걸고 만들기 시작한 잡지였다. 그는 어느 날 나의 사무실로 찾아와 이런 말을 했었다.

“퇴직금과 물려받은 작은 땅을 밑천으로 혼자 잡지를 만들기로 했어요. 어디를 가나 연예인의 스캔들이나 피 냄새가 나는 사건기사들이 가득한 잡지투성이예요. 아니면 최상류층의 허영심을 자극하는 사치품을 선전하는 잡지든가요.

이런 잡지들 속에서 한번 완전히 거꾸로 가 볼 예정입니다. 촌스러운 디자인에 풀꽃 같은 보통사람들의 삶이 담긴 잡지를 만들어보는 겁니다.”

 

그의 뒤에는 보이지 않는 그분의 후광이 있는 것 같았다. 삼십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그의 아들에게 이어져 출퇴근하는 사람들이나 병원 환자들의 마음을 촉촉하게 해 주고 있다.

나는 샘터라는 작은 잡지를 보면서 컸다. 그 안에 영혼의 스승들이 있었다. 법정 스님, 소설가 최인호, 이해인 수녀등이었다. 잡지는 사상을 담고 향기를 담아 사람들에게 전하는 그릇이었다.

◇ 일본의 기독교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 (内村鑑三, 1861 ~ 1930) 

오늘은 백년전 일본의 군국주의 시절 외고집으로 시대에 저항하는 나 홀로 잡지를 만든 노인의 글을 읽었다. 오십쪽 안팎의 작은 잡지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독교를 기피하는 일본 사회에서 한 일본인이 ‘성서연구’라는 잡지를 고집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그가 남긴 글을 통해 그의 영혼과 대화를 했다.

 

‘왜 그런 잡지를 만들었습니까?’

내가 마음으로 물었다.

‘내가 살던 시절 대부분의 잡지는 비판하고 선동하는 그런 것들이었소. 나는 죽이기 위한 게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살리고 상처를 가하는 게 아니라 아픔을 치유하고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위안을 주는 그런 잡지를 만들고 싶었소. 사람들을 치유하기 위해 나 홀로 잡지를 선택한 거요.’

 

‘어떤 내용을 담으셨습니까?’

‘나는 어려서 공맹 사상을 공부하고 일본 봉건주의의 무사집안의 아들이었소. 그러다 성경을 읽었지. 성경은 전 세계적인 글이고 논어나 맹자보다 깊다고 생각했소. 고민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근본적인 위로를 줄 수 있었소. 성경은 과거의 기록이지만 사실은 오늘의 글이오. 죽은 글처럼 보이지만 살아있는 글이오. 거기에 나와 있는 인생관을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었소. ’

‘어떤 돈으로 만들었습니까? 사람들이 안 사 볼 것 같은데요?’

‘내가 돈을 벌어서 만들었소 어떤 단체나 외국선교사의 도움도 사양했소. 나는 기자를 하다가 러일전쟁을 반대하는 글 때문에 쫓겨났소. 수입도 생활비도 없는 상황이었지. 그때 솔직히 폐간하려고 했는데 기적이 일어났소. 독일에서 내가 쓴 책이 번역되어 그 인세가 와서 잡지를 계속 만들게 된 거요. 알고 보니 하나님이 후원자였소. 그런 기적이 많았소.’

 

‘잡지를 어떤 마음으로 만들었죠?’

‘만일 예수라면 이 일을 어떻게 할까라고 생각했소. 글은 펜으로만 쓰는 게 아니오. 그분의 지도를 받고 그 분 안에서 써야 하오. 책상 앞에서 펜을 잡을 때 나는 그분과 함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끼기도 하고 또 친구를 상대로 이야기 하는 것 같이 느꼈지. 나의 펜이 나의 손에서 떨어질 때까지 나는 글 쓰는 즐거움을 그만두지 않으려는 마음이었소. 나의 시력이 계속되는 한 나의 펜은 움직일 것 같았소. 기도하며 원고를 쓰고 기도하며 교정을 보고 기도하며 발송을 했소.’

‘그 시절 미국에 유학도 갔다 오시고 잘나가는 언론인 생활도 하셨는데 전도지 같은 그런 작은 잡지에 삶을 투자한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만’

‘나의 생애에서 가장 좋은 부분을 나는 성서연구에 바쳤소. 십육년 칠 개월, 사람의 일생에서 짧은 세월이 아니었소. 사람들이 부를 만들고 있는 동안에, 벼슬을 자랑하고 있는 동안에, 정치에 바삐 뛰고 있는 동안에 나는 혼자서 그렇게 살았소. 가늘고 길게 조용하고 단단히 그게 나의 방침이었소.’

그의 작은 잡지가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바꾸어놓았다. 그의 사상연구에 일생을 바친 동경대교수가 나왔고 그의 정신을 따르는 수상이 탄생했다. 한국의 류영모, 함석헌, 김교신 선생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일을 하나 잡아 인생을 투자하는 것. 돋보기가 햇빛을 한 점에 모을 때 종이에 불이 붙고 타오르는 것 비슷한 게 아닐까.

글 | 엄상익 변호사

경기중-고, 고려대 법대를 나오고 제24회 사법시험(1982)에 합격했다. 6공 때, 국정원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 특별보좌관실에 근무하며 권부의 이면을 보았다. 변호사를 하면서 ‘대도 조세형’, ‘탈주범 신창원’ 등 사회 이목을 끌은 대형사건 피의자들을 변호했다. 글쓰기를 좋아해 월간조선을 비롯, 조선-중앙-동아일보 등에 칼럼을 연재했고 수필집, 장편 소설 등 1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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