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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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십년대 중반 강남에 아파트가 지어지고 포니라는 국산 자동차가 탄생했다. 그 시절 강남에 있는 친구의 열일곱 평짜리 아파트를 가보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따뜻한 물이 나오고 깨끗한 변기를 보고 이런 집도 있구나 하고 감탄했다.

나는 재래식 변소에 무너져 가는 낡고 추운 일본식 목조주택에서 컸다. 꿈이 생겼다. ‘열일곱 평 아파트와 포니’였다. 그것만 가진다면 으스대며 행복하게 살 것 같았다.

그로부터 오십년의 세월이 흘렀다. 며칠 전 유튜브에서 젊은 사람들의 꿈을 들었다. 서울에 있는 삼십평대의 아파트에 벤츠 이클래스 정도를 가지고 싶다는 것이었다. 빨리 퇴직을 하고 자유롭게 살려면 삼십억원쯤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 돈을 만들려면 연봉이 괜찮아도 오랫동안 돈에 매달리는 경제적 노예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십 년 전쯤이었을까. 부자인 인생 선배에게 “얼마 정도의 돈이 있으면 여생을 편하게 지낼 수 있을까요?”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금융자산이 이십억쯤 있으면 되지 않을까?”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그는 삼사백억 이상이 될 때부터 돈이 애물단지로 변하더라고 했다. 수시로 투자하라고 사기꾼들이 몰려들고 임차인과의 소송이 그칠 날이 없다고 했다.

자기집에서 사는데 한 달에 천만원 이상의 재산세를 내는 셈이고 의료보험료도 그만큼 낸다고 했다. 그런데도 항상 세무서의 주목대상이 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재산에 꽁꽁 묶여 사는 신세라고 했다.

나는 늙어 봤다. 젊은 날 빨리 많이 벌어서 자유롭고 편하게 살 꿈을 꾸어보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의 개인적인 체험과 생각을 나누고 싶다. 내가 부러웠던 아파트나 차가 정말 순수하게 내가 원하던 것이었을까. 변두리의 다가구 주택이 정말 불편한 것일까. 거기에는 다른 사람의 눈과 평가를 의식한 허영이 들어 있지 않았을까.

멋지게 차려입은 미남이 매끈한 페라리 앞에 서 있다. 광고는 그 차를 성공의 상징으로 인식시킨다. 그건 자본주의 마케팅의 최면술이었다. 아파트 선전도 비슷하다. 엠파이어니 로열이니 하는 수식어를 붙인 아파트에 살면 귀족이 된 것 처럼 사람들이 착각한다.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아파트의 브랜드가 계급을 나타내는 징표로 사용된다고 들었다.

젊은 날 나는 나름대로 세상이 던지는 그런 그물에 걸리지 않으려고 조금은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욕심 그릇이 작으면 행복하다’고 말하면서 가난을 미화할 생각도 없었다. 돈은 자유를 얻을 수 있기에 중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얼마의 돈을 벌어야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많을수록 좋겠지만 그 욕심이 클수록 자칫하면 자유가 아니라 노예가 될 것 같았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남들에게 과시할 그런 물건들일까?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지금 여기서 내 마음대로 하기로 결심했었다. 집이 없어도 차가 좋으면 그걸 선택할 수도 있다고 봤다.

나는 가족과 맛있는 것을 먹고 여행을 가는 것을 최우선 순위로 잡았다. 가난했던 이십대 젊은 날 아내와 명동의 고급 갈비집으로 갔다. 돈이 부족해 일인분만 시켜 나누어 먹었었다. 훨씬 맛이 좋고 행복했다.

결혼기념일엔 워커힐 불란서 식당에 가서 랍스터를 먹었다. 한 달 월급을 한끼 식사에 다 털어넣고 빚을 진 적도 있었다. 평생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은 순간이었다.

주위에서는 나같이 살면 나중에 거지가 된다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순간의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돈은 있어도 순간을 느끼는 감성이나 미각이 없다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변호사를 하면서 나는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다녔다. 구치소를 들어갈 때면 혼자 걸어서 긴 언덕을 올라갔다. 경비교도관이 수시로 신분을 확인했다. 다른 변호사들은 경쟁하듯 고급 승용차를 탔다. 옷도 시계도 가방도 안경도 최고의 명품인 경우가 많았다.

나는 그런데 쓸 돈을 여행으로 돌렸다. 세계일주를 하는 퀸 엘리자베스호를 탔었다. 초등학교 시절 교과서에 나온 그 배였다. 고갱이 살던 타히티섬과 보라보라섬을 찾아갔었다.

눈덮인 자작나무가 끝없이 이어진 시베리아 대륙을 기차로 횡단했다. 인도를 가고 괴테를 따라 이탈리아 여행을 하기도 했다. 돈이 없으면 평택에서 엘엔지선을 얻어 타고 사우디 쪽으로 향하기도 했다. 느낄 수 있을 때 간다는 결심이었다. 촉촉한 감성은 늙으면 메마르기 마련이다. 그렇게 늙었다. 그래도 나는 가난으로 파산하지도 않고 거지가 되지도 않았다.

나는 지금 저렴한 실버타운에서 살고 있다. 차도 칠백만원짜리 중고 경차를 타고 있다. 그렇지만 매일 햇빛에 반짝이는 동해바다의 해변을 산책한다. 황혼 무렵 하늘을 물들인 신비로운 색조에 취하기도 한다.

삶은 남의 눈을 의식하고 다른 사람의 입술 위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다음에 나중에는 없다. 순간순간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작은 보석 같은 행복을 놓치지 않아야 하지는 않을까.

글 | 엄상익 변호사

경기중-고, 고려대 법대를 나오고 제24회 사법시험(1982)에 합격했다. 6공 때, 국정원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 특별보좌관실에 근무하며 권부의 이면을 보았다. 변호사를 하면서 ‘대도 조세형’, ‘탈주범 신창원’ 등 사회 이목을 끌은 대형사건 피의자들을 변호했다. 글쓰기를 좋아해 월간조선을 비롯, 조선-중앙-동아일보 등에 칼럼을 연재했고 수필집, 장편 소설 등 1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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