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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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걷다 보면 유리창을 통해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이는 커피숍을 지나친다. 탁자를 앞에 놓고 마주 앉은 사람들이 대화 없이 각자 자신의 스마트 폰을 들여다 보고 있다. 그들이 만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각자에게 앞의 사람은 어떤 존재일까. 그걸 만남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래 전이다. 한 모임에서 좌장이 되는 선배가 수시로 핸드폰을 보고 메시지를 주고 받았다. 말 한마디 하는둥 마는 둥하고 다시 핸드폰을 들고 뭔가 열심히 써서 보내는 것 같았다. 앞에 있는 우리들은 관심 밖이거나 무시당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같이 있던 친구가 그 선배를 보고 화를 냈다. 선배가 사과했지만 뭔가 찌꺼기가 마음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왜 어렵게 시간을 내 서로 만나서 앞에 있는 사람에게 집중하지 못하는 것일까.

극장을 간 적이 있다. 어두운 속에서 여기저기서 스마트 폰의 하얀 빛이 번쩍였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면서도 수시로 스마트 폰을 꺼내 뭔가를 확인했다. 영화에 몰입하지 않는 것 같았다.

사람들과 만나 얘기하는 도중에도 스마트 폰은 수시로 끼어든다. 카톡도 마찬가지다. 전화나 메시지를 받는 게 먼저가 되어있는 세상 같다. 만난 사람이 전화를 길게 받고 있는 걸 보면 내가 왜 그 자리에 있나?하는 생각이 든다. 투명인간이 된 느낌이라고 할까. 그는 통화하는 상대방과 만나고 있는 것이다. 집에서도 스마트폰을 보면서 밥을 먹고 드라마를 보기도 한다.

내 경우는 한 번에 한 가지 밖에 못하는 뇌를 가지고 있다. 나의 시각으로 핸드폰을 들고 하루를 보내는 사람은 건성인 것 같아 보인다. 그는 만난 사람에게 집중했을까. 일에는 몰입한 것일까. 영화나 드라마는 제대로 감상한 것일까.

어린 시절 어머니는 내게 공부할 때 공부하고 놀 때 놀라고 했다. 평범하고 당연한 말 같았다. 그러나 나는 반대였다. 공부할 때는 놀 생각이 가득하고 놀 때는 공부걱정을 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저녁에 친구들과 만나 스트레스를 풀 시간이면 엉뚱하게 일을 생각하고 일할 때면 다른 상상에 빠져 있었다.

고시 공부를 시작할 무렵이었다. 독서실에서 법서를 펼쳐놓고 나는 꿈을 꾸었다. 판검사가 되어 우쭐거리는 모습이었다. 그 꿈에 취해 초라한 고시원 생활을 버텨냈다. 시험에서 실패를 거듭하면서 꿈이 점점 희미해지고 마음이 공허해졌다.

그때 고시에 붙은 한 선배의 말이 지금도 인식의 벽에 그대로 붙어있다. 나무 열매를 생각하지 말고 매일 그냥 조금씩 꾸준히 물을 주라고 했다. 결과를 생각하지 말고 순간순간 몰입하라는 말이었다.

활 쏘는 궁수의 얘기를 어느 철학자의 글에서 읽었다. 비슷한 의미가 담겨있었다. 그 핵심 내용은 이렇다. 과녁에 백발백중으로 활을 쏘아 맞추는 궁수가 있었다. 그걸 보던 왕이 명중을 하면 금을 상으로 내리겠다고 말했다. 그 순간부터 그 궁수는 과녁에 화살을 적중시키지 못했다.

글을 쓴 철학자는 그 이유를 왕이 상을 거는 순간 과녁이 두 개가 됐다고 설명했다. 과녁에 집중해야 하는 데 머리 속에는 상이라는 또 하나의 과녁이 생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실패를 거듭하다가 마지막에 잠시 집중을 경험했다.

집중은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지 못하게 했다. 두꺼운 책이 몇줄 몇 단어로 압축이 되는 느낌이었다. 결과에 대한 욕망이 증발했다. 내가 책이었고 책이 나였다. 그때 열매인 합격이 다가왔었다.

인생을 공허하지 않고 밀도 있게 살려면 몰입이나 집중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건성으로 사는 것은 허무감을 불러일으킨다.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에게 몰입하고 드라마를 봐도 거기에 빠져야 하는 게 아닐까.

어제저녁 비가 그친 저녁 무렵 해변으로 산책을 나갔다. 하얀 파도가 포말을 일으키며 달려와 검은 바위에 부딪치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신비로운 색조의 해질녁 하늘이었다. 사람이 없는 해변은 적막했다. 나는 그 아름다운 광경에 몰입하고 감사했다.

나는 작은 일본 음식점으로 가서 ‘돈까츠 라멘’을 먹었다. 그 순간 라멘을 먹는 데 집중하면서 맛을 음미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고려거란전쟁’이라는 드라마를 열심히 보고 단잠에 빠져 들었다.

글 | 엄상익 변호사

경기중-고, 고려대 법대를 나오고 제24회 사법시험(1982)에 합격했다. 6공 때, 국정원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 특별보좌관실에 근무하며 권부의 이면을 보았다. 변호사를 하면서 ‘대도 조세형’, ‘탈주범 신창원’ 등 사회 이목을 끌은 대형사건 피의자들을 변호했다. 글쓰기를 좋아해 월간조선을 비롯, 조선-중앙-동아일보 등에 칼럼을 연재했고 수필집, 장편 소설 등 1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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