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시작되면 나는 대지에
구멍 하나를 판다 그리고 그 안에
겨울 동안 모인 것들을 집어넣는다
종이 뭉치들, 다시 읽고 싶지 않은
페이지들, 쓸모 없는 말들,
파편들, 실수들을
또한 헛간에 보관한 것들도
그 안에 넣는다
햇빛과 땅의 기운,
여정의 일부를 마친 것들을
그런 다음 하늘에게, 바람에게
충실한 나무들에게
나의 죄를 고백한다
나에게 주어진 행운을 생각하면
나는 충분히 행복해 하지 않았다
나는 너무 많은 소음에 귀 기울였다
경이로움에 무관심했다
천사를 갈망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곳에 모여진
몸과 마음의 쓰레길들 위로 구멍을 메운다
그 어둠을, 그 죽음 없는 대지를 닫으며
그 봉인 아래서 낡은 것이
새것으로 피어난다
융은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논했지만, 기실 인간에게는 늘 여러 모습이 있다.
여성성이거나 남성성으로만 표현할 수 없는 모습들이 있어 융 자신도 거론했듯 인간은 만나는 이마다 다른 모습을 꺼내 보인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 모든 모습을 꺼내게 만드는 것이 사람과의 만남이라면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자연 앞의 모습이다.
자연 앞에서 우리는 그저 고요해진다.
자연의 힘을 알고 경이로운 모습들을 알고 있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 중장비를 들고 저 자연을 정복하고자 덤비는 이라면야 다르겠지만 그들마저도 한 겨울은 피한다.
모든 것이 얼어붙었기 때문에 인간의 힘이 도무지 통하지 않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성균관대를 나왔다. 성균관대 번역대학원에서 번역학 석사를 했고 토니 모리슨 연구로 영문학 박사를 받았다. 호남대를 거쳐 현재 성균관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10여년 전 3기, 암을 진단 받았고 몸과 마음의 관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 문학과 명상, 치유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 수행을 지속하고 있다. 병 기록을 담은 책 『몸이 아프다고 삶도 아픈 건 아니야 2012)를 펴냈고 십여 권의 영한 및 한영 번역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