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터스톡
셔터스톡

봄이 시작되면 나는 대지에 
구멍 하나를 판다 그리고 그 안에
겨울 동안 모인 것들을 집어넣는다

종이 뭉치들, 다시 읽고 싶지 않은 
페이지들, 쓸모 없는 말들, 
파편들, 실수들을

또한 헛간에 보관한 것들도
그 안에 넣는다

햇빛과 땅의 기운,
여정의 일부를 마친 것들을

그런 다음 하늘에게, 바람에게
충실한 나무들에게
나의 죄를 고백한다

나에게 주어진 행운을 생각하면 
나는 충분히 행복해 하지 않았다

나는 너무 많은 소음에 귀 기울였다
경이로움에 무관심했다

천사를 갈망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곳에 모여진
몸과 마음의 쓰레길들 위로 구멍을 메운다

그 어둠을, 그 죽음 없는 대지를 닫으며
그 봉인 아래서 낡은 것이
새것으로 피어난다


융은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논했지만, 기실 인간에게는 늘 여러 모습이 있다.

여성성이거나 남성성으로만 표현할 수 없는 모습들이 있어 융 자신도 거론했듯 인간은 만나는 이마다 다른 모습을 꺼내 보인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 모든 모습을 꺼내게 만드는 것이 사람과의 만남이라면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자연 앞의 모습이다.

자연 앞에서 우리는 그저 고요해진다.

자연의 힘을 알고 경이로운 모습들을 알고 있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 중장비를 들고 저 자연을 정복하고자 덤비는 이라면야 다르겠지만 그들마저도 한 겨울은 피한다.

모든 것이 얼어붙었기 때문에  인간의 힘이 도무지  통하지 않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글 | 이강선 교수

성균관대를 나왔다. 성균관대 번역대학원에서 번역학 석사를 했고 토니 모리슨 연구로 영문학 박사를 받았다. 호남대를 거쳐 현재 성균관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10여년 전 3기, 암을 진단 받았고 몸과 마음의 관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 문학과 명상, 치유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 수행을 지속하고 있다. 병 기록을 담은 책 『몸이 아프다고 삶도 아픈 건 아니야 2012)를 펴냈고 십여 권의 영한 및 한영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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