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사학년 때였다.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뛰어 놀고 있었다. 선생님이 갑자기 나를 부르더니 같은 반 아이를 교무실로 데리고 오라고 했다. 운동장을 돌아다녀 봐도 그 아이를 찾을 수 없었다.내게 선생님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나는 버스를 타고 그 아이의 집으로 찾아갔다. 어느새 해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그 아이는 식구들과 막 저녁을 먹으려는 참이었다. “선생님이 너 오래”내가 그렇게 말하고 그 아이와 함께 다시 버스를 타고 학교로 갔다. 밤이었다. 불이 꺼진 교무실은 적막감만 감돌고 있었다. 이상했다.명령을 한
# 세상은 선한 세상과 악한 세상으로 나뉘어져 있지 않다. 혼재돼 있다. 사람도 선인과 악인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우리 내면에 섞여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선한 세상과 선한 사람들만 갈망하고 왜 현실은 그렇지 않느냐고 원망하고 우울해하고 분노한다. 사회적 갈등과 사건, 개인적 신경증과 질병은 여기서 발원된다.일본 애니메이션의 전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최신작 는 이런 ‘부조리한 세상’(그게 현실인데) 속에서 힘들어 하는 어린이들과 상처받은 어른들을 위해 응원과 위로를 보내고 있다.어머니를 잃은
사할린 동포의 70% 가량은 고향이 경상도나 전라도 등 남한쪽 사람들이었다. 동포들은 귀향할 날을 기다리며 무국적 상태로 오랜 세월 고난의 삶을 이어갔다.한국과 소련이 국교를 수립할 때(1990년)까지 해방 후 무려 45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코르사코프 항이 내려다보이는 망향의 언덕에 2007년 세워진 ‘일본 군국주의에 의한 한인 희생자 위령탑’ 아래에는 서울대 김문환 교수가 지은 다음과 같은 글이 검은 돌 위에 새겨져있다.1945년 8월, 애타게 그리던 광복을 맞아동토의 사할린에서 강제노역하던 4만여 동포들은고국으로 돌아가기 위
이 사건 역시 1945년 8월 18일, 북위 50도 소련과의 사할린 국경 바로 아래 포로나이스크 지역 가미시스카(현재 이름은 레오니도보)경찰서에서 발생한 조선인 집단 학살사건이다.소련이 8월 8일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후 탱크를 앞세워 남사할린으로 쳐내려오자, 최북단 군사도시인 가미시스카 지역의 일본군경과 일인들은 급격히 혼돈상태로 빠져들었다. 일본군은 8월 17일 지역내 모든 주요 시설에 대한 파괴를 결정하고 일본인 주민들에게는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그런 한편으로 일본 헌병과 경찰은 ‘조선인들이 소련군과 내
일반적으로 한국인의 몸에 대한 인식은 대부분 외모와 육체적 건강에만 신경을 쓴다. 그렇다 보니 몸에 좋은 음식이나 다이어트, 헬스 등 외형적인 것에만 관심을 둘 뿐이다.하나로 움직여야 할 몸과 마음은 분리되어 있다. 정신 역시 몸과 관련이 없는 것처럼 알고 있다.몸과 마음・정신은 모두 통합되어 있는 하나의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로따로 다루다 보니, 몸을 제대로 돌볼 수가 없다. 몸이 보내는 이상신호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해 한 순간 육체적 건강을 잃거나, 여러 정신적인 문제나 마음의 고통을 받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우
최근에 몇몇 지인들과 한담을 나누던 중에 성숙한 사람이란 주제로 의견을 나눈 적이 있다.요즘 TV에 보면 정치인들과 정치 평론가들이 자주 등장하여 설전도 벌이고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프로그램을 자주 보게 된다.그런데 그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다보면, 거의 대부분이 사실(fact)에 근거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내편 네편으로 갈라서 듣기에 식상한 억지 주장들을 펴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물론 성숙한 모습을 보이는 정치인과 정치평론가들도 많이 있지만, 대부분은 자기 진영을 보호하려는 궤변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성숙한 인격을 찾아보기
삼십여년 전 한 작은 잡지에 고정칼럼을 썼던 적이 있었다. 회사를 다니던 사람이 퇴직을 하고 그의 일생을 걸고 만들기 시작한 잡지였다. 그는 어느 날 나의 사무실로 찾아와 이런 말을 했었다.“퇴직금과 물려받은 작은 땅을 밑천으로 혼자 잡지를 만들기로 했어요. 어디를 가나 연예인의 스캔들이나 피 냄새가 나는 사건기사들이 가득한 잡지투성이예요. 아니면 최상류층의 허영심을 자극하는 사치품을 선전하는 잡지든가요.이런 잡지들 속에서 한번 완전히 거꾸로 가 볼 예정입니다. 촌스러운 디자인에 풀꽃 같은 보통사람들의 삶이 담긴 잡지를 만들어보는
“도대체 제대로 일을 해보자는 거야? 남 하는 것 따라나 가자는 거야?"김과장이 회의실 문을 쾅 닫고 나와 자기 자리로 돌아가면서 내뱉었다. 직원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 쳐다봤다. 김과장 성격이 다혈질이긴 하나 저렇게 공개적으로 화를 내는 모습은 흔치 않았는데…. 더구나 직속상관인 부장과 단 둘만의 회의 아닌가.‘도대체 무슨 일로 저렇게…’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부장이 회의실 문을 벌컥 열어 제치고 소리쳤다.“김과장. 다시 들어 오세요. 회의하다 어디 먼저 나가! 버르장머리 없게시리…." 평소 온화한 성격의 부장도 화가 단단히 났는가 보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목소리에선 금속성 쇳소리가 났다. ‘쿵쾅 쿵쾅’ 김과장이 발자국 소리도 요란하게 다시 회의실로 들어갔고 이어 “일본 진출이 그렇게 만만하게 보이나?", “왜요, 제 아이디어가 어때서요" 라는 고성이 서로 오갔다. 사태 전말은 이랬다. 부장은 최근 다이어트 음료를 비롯한 회사 신제품들의 글로벌화 방침에 따라 대일본 진출 전략보고서 작성을 김과장에게 맡겼다. 물론 회사 전략기획실이 따로 있지만 사장이 실제 현장 간부들의 의견을 구했기 때문이다. 회사가 워낙 여유 시간을 안주고 밀어붙이는 통에 김과장의 보고서 작성도 3일내 속전속결로 이뤄졌다. 문제는 전략 방향과 정책이 근본적으로 부장의 생각과 다른 데서 비롯됐다. 부장이 볼 때는 소주 등 몇몇 상품을 제외하고는 일본에 진출한 한국산 소비재들이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일본 시장 벽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째, 사전에 광범위한 시장 조사가 이뤄져야 할 것, 둘째 워낙 까다로운 일본인들의 취향을 거울삼아 철저한 현지화(localization) 전략을 수립할 것 등 두 가지를 가이드라인으로 정했다. 그러나 작성된 김과장의 리포트는 정반대 입장이었다. 그는 한류 드라마의 일본 성공을 예로 들었다. “1)한류 드라마가 일본에서 성공한 이유는 일본인의 취향에 맞춘 것이 아니라 철저히 현대 한국적 취향에 충실했기 때문임. 다시 말해 일본 진출을 염두에 두고 일본을 의식해 만들었다면 도리어 실패할 확률이 높았을 것임. 2)한류 드라마가 비단 일본 뿐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서 성공을 거둔 핵심 요인은 현대 한국인의 기질, 취향, 정서, 스타일, 생활, 사회상 등이 국적 불문하고 큰 공감대를 불러 일으켰다는 점이며 이 같은 ‘한국적’ something이 바로 우리의 경쟁력임. 3)기존 한국 제품의 일본 진출 실패도 같은 맥락에서 분석할 수 있음. 즉 ‘한국적’인 것이 아니라 현지화, 곧 ‘일본화’ 전략을 시도한 것이 실패의 핵심 요인임. 이는 결국 일본 제품을 모방하는 수준에 그쳐 ‘한국 제품=일본 제품의 아류’라는 인식을 일본 소비자들에게 심어 주었음. 4)따라서 이번 본사의 일본 진출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제품의 내용, 디자인, 광고 등 일체를 현대 한국적 컨셉을 바탕으로 한 ‘한국화’ 전략이 필수 요소로 사료됨." 부장과 한바탕 치른 내용이 어느새 전해졌는지 다나카 고문이 오후 느지막할 무렵,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김과장을 찾아 왔다.“그렇게 윗 사람과 큰 소리로 싸워도 괜찮습니까?" “아니, 내가 틀린 소리 했나요? 남이 하는 식으로 따라 해서 이길 수 있어요? 관행은 무슨 얼어 죽을 관행! 제대로 작동 안됐다면 점검도 하고 고치기도 해야지. 일본 법인장 꿈에 부풀어 ‘예스’만 하고 있으니…" 아직도 분이 안 풀려 씩씩대는 김과장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다나카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일본에선 담박 이건데"라며 손으로 목 자르는 시늉을 했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허허"하고 웃었다. 다나카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와 말을 꺼냈다. “한국 사람들, 화도 잘 내고 잘 싸우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화해도 빨라요. 일본 사람들이 볼 때는 고무줄 같이 신축자재의 성격이죠. 내가 요즘 한국 현대사를 읽고 있는데 한국 사람들은 평소에는 가만히 있다가도 국난이나 국가적 행사를 만나면 똘똘 뭉쳐서 위기를 헤쳐 나가는 저력을 발휘해 왔어요. 분명한 목표가 설정되고 자발적인 동기만 유발되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 한국 사람들의 가장 큰 장점이에요." “허허. 그런데 과거 일본 사람들이 한국 지배할 때 우릴 ‘모래알’ 민족이라고 불렀어요. 뭉치지 못하기 때문에 나라를 이끌 힘도 없다고 하면서…" 김과장의 말에 다나카가 놀란 토끼 마냥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반박했다.“무슨 소리에요? 한국인은 ‘진흙’ 민족이에요." “지난 2002년 일-한 월드컵 때 저는 일본서 봤어요. 그때 정말 창피했어요. 경기 성적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거리 응원에서부터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로 뒤덮여 즐거워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너무 부러웠어요. 일본에선 ‘그냥 하나보다’며 축 처진 분위기고, 만약 일본 거리에서 ‘대-일본국’을 외치면 정신이상자 소리 들었을 겁니다. 한국의 유쾌한 광장문화 그리고 붉은 악마! 정말 우리가 부러워하는 겁니다." “과거 일본 사람들은 ‘한국인들이 나라도 생각 안하고 오직 제 살 궁리만 찾는 이기적인 민족’이라고 비판했는데 요즘에는 정반대로 ‘너무 애국적이다, 국수주의적이다’라고 비판한다면서요?" 김과장이 다소 느물느물한 표정으로 물었다.“‘나라 생각 안 하는 민족’이란 말은 별로 기억에 없고, ‘너무 애국적이다. 민족주의가 지나치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특히 일-한 문제만 나오면 한국 사람들은 모두 국가대표 선수처럼 적극적으로 나서죠." 다나카의 이날 화법은 종전의 것과 확실히 차별화됐다. 예전에는 한국 비판을 얄미울 정도로 잘했는데 오늘은 도리어 한국 편에 서서 말하고 있었다. 분명히 비판적인 이야기도 많이 있을텐데 더 내색을 하지 않는 것으로 김과장은 생각했다.‘일본인 본연의 조심스런 태도로 돌아간 것일까, 아니면 한국에 대한 이해를 넓혔기 때문인가?’ 다나카가 생각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 한국 사람들이 대통령이나 높은 사람 욕 마구 해 놀랐어요. 나라 욕 저렇게 해도 되는가 생각했죠. 그러나 지나고 보니 나라 욕 그렇게 하지만 모두 애국자들이더라구요. 그만큼 나라 생각이 많으니까 비판도 많이 하게 되는 거죠." 김과장이 입을 열었다.“우리 한국 사람들끼리 늘 한국 비판을 많이 해요. 그 중 하나가 냄비근성인데, 그래요. 한국인은 냄비처럼 쉽게 끓어오르고 쉽게 식는 경향이 있지만 이것을 꼭 나쁜 의미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을 요즘 깨달았습니다. 냄비근성을 거론하면서 한국 사람들은 ‘역사나 과거를 자주 잊는 민족’이라고 자탄하는 데 일본 사람 보기에 어떻습니까?" 다나카가 다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말이에요. 한국 사람들 너무 과거 잘 안 잊어서 문제에요. 특히 일본에 대해…" 김과장은 평소보다 2시간 가량 빨리 회사를 나왔다. 부장과 한 칸 건너 앉아 천연덕스럽게 앉아 있기도 거북했다. 한기자가 근무하는 신문사 근처 다방에 먼저 와 한기자를 기다리면서 책을 뒤적거렸다. 그의 손에는 미국 유수 경영 컨설턴트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성공학’ 책자가 들려 있었다.“성공하는 사람이 되려면 자신감과 모험을 감수할 능력을 필요로 한다. 정열적인 관심 뿐 아니라 자신감이 반드시 포함된다. 참신한 아이디어를 추구하고, 다른 사람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실수를 저지르려면 건강한 자존심이 필요하다. 자기 회의에 빠질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거기서 벗어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규칙을 깨고, 심지어 그것들을 왜곡하려면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회의론과 조소에 맞닥뜨린 상황에서도 계속 밀고 나가려면 훨씬 더 많은 자신감이 필요하다." ‘꼭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군’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한기자가 들어 왔다. 자초지종을 들은 한기자가 한마디 했다. “성질 좀 죽이지. 누군 성깔 없어 이러고 지내냐?"김과장이 말을 돌렸다.“선배. 아까 다나카가 한국 사람들은 너무 과거를 잘 안 잊는 민족이라고 했는데 그게 말이 되는 거요?" 한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들 입장에선 그럴 수 있지. 과거 아시아 국가 중 일본 지배 안받아본 나라 거의 없지?" 한기자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일본으로부터 공식사과 받은 나라는 우리나라 하나 밖에 없어. 일본과 전쟁을 치르고 중국 전 영토를 지배당하고 만주 괴뢰국까지 등장해 고통 받았던 중국도 아직 사과를 못받았다네. 중국 언론은 대일 문제와 관련해 중국인민들에게 ‘제발 무기력하게 있지 말고 한국처럼 맹렬하게 맞서라’고 은근히 부추기고 있다네." “그래요. 정말 한국 사람들 만만치 않네."“그럼. 독립적 성향으로 알아주는 베트남도 보게나. 백 년 이상 식민 지배를 당한 프랑스로부터 아직 사과를 받지 못했어." “아. 그런가? 난 몰랐네." “왜 그런 줄 알어? 바로 국력 때문이야. 국력이 커지니까 일본이 한국에 사과한 것일세. 만약 한국 국력이 커지지 않았다면 일본은 사과하지 않았을 걸. 베트남도 국력이 커진다면 도도한 프랑스도 사과할 걸세."“아.그렇군요."한기자가 갑자기 ‘자주(自主)’로 화제를 돌렸다.“자주란 개념 자체도 지구촌 사회에서 잘 안 쓰이는 용어지만 가난과 맨 땅에서 이렇게 나라를 키운 한국과, 공산권이 망해버려 원조가 끊기니까 세계 최빈곤국으로 전락한 북한 중 누가 더 자주적이며 독립적인 나라인가?" 김과장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세상일은 참 재미있어요. 남-북한 예를 봐도 겉과 속이 그렇게 다르네요. 한일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사람은 고향을 떠나 자주 이동하고 이민도 잘 가지만 늘 고향과 뿌리를 잊지 않습니다. 고향에 대한 애착, 지연에 대한 존중, 일가친척으로 대변되는 가문의 힘 그렇지 않습니까?" “반면 일본은 고향을 떠나지 않고 정착을 선호하는 사람들이지만 의외로 고향이나 집안에 대한 귀속의식이 우리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희박하지. 구로다 특파원도 ‘한국은 고향이라는 지연과 일가친척이라는 혈연을 중시하는 전통 사회에 살고 있는 반면, 일본은 근대화를 통해 그것을 뛰어넘었기 때문에 ‘망향’이나 ‘형제’ ‘혈육의 정’에 대한 관념이 별로 없다’고 썼더군." 김과장이 다시 말했다.“한국은 잘 싸우지만 내면적으로 끈끈한 사회인 반면, 일본은 겉으로 안 싸우고 화합이 잘 되는 것 같지만 내면적으로 ‘서로 제각기 사는’ 모래알 사회 아닌가 생각돼요. 다시 말해 한국에선 싸우면서 자기 주장을 펴면서 소란스럽긴 하지만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고 수렴되는 사회지만, 일본에선 서로 조심하면서 자기 주장을 억제하면서 조용하게 살지만 결국 한 가지 의견만 나오고 받아들여지는 사회죠." 한기자가 진심어린 표정으로 칭찬을 했다.“자네 요즘 주장하는 논리나 포인트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네." 눈웃음을 치면서 김과장이 다시 논리를 폈다.“한국이 아니라 사실 일본이 모래알 사회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바로 일본 정치 엘리트들이죠. 그래서 그 모래알들을 결집시키기 위해 천황을 들고 나오고, 군국주의를 가르쳤고, 지금 또다시 이를 부활시키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김과장으로선 이제 박교수와의 만남이 스스럼없었다. 연세도 아버지 뻘 되는 데다 여러 번 만나다 보니 매우 자상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었다. 아들 뻘 되는 사람에게도 거의 꼬박 존대말로 응대해줘 이번에는 김과장이 “말을 놓아 달라"고 간청하기까지 했다. 박교수도 ‘허허’ 웃으며 말투를 반말로 바꾸었다.“이제 김과장은 보다 긍정적으로 보기 시작했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사회에 대해서나?"“그렇습니다. 교수님의 말씀을 곰곰이 새기면서 제 자신의 장점, 한국 사회의 긍정적 면을 찾기 시작했습니다."“여.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인데 내게 귀띔 좀 해주겠나?" “제 가장 큰 장점은 ‘촌놈 기질’이더라구요. 투박스럽긴 하지만 솔직하고 건강하고 성질도 좀 있지만 남에게 그리 경우 없는 행동도 안하고, 한 입으로 두 말 하지 않고…. 그리고 무엇보다 잘 살아보겠다, 성공하겠다, 부족한 나를 더 발전시키겠다는 의욕이 제게 많은 것 같아요. 그런 점들이 참 좋습니다."박교수가 모처럼 껄껄 웃으면서 좋아했다.“그래요. 지금 자네는 긍정적으로 자신을 보기 시작한 걸세. 이는 곧 자네 내면에 존재하는콤플렉스가 서서히 극복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거지. 자네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태도는 전혀 자기 도취가 아냐. 객관적으로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 거지. 그렇다면 한국 사회를 볼 때 어떤 생각이 드나?"김과장은 직장 동료 다나카와의 대화를 나누면서 도리어 한국 사회의 장점을 많이 발견했다고 말했다.“그 분이 한국을 비판하는 말을 자주 듣다 보니 처음에는 욱하는 마음에 반박하곤 했지만 그 덕분에 한국 사회의 좋은 점은 무엇일까를 탐색하게 된 것 같아요. 한국인을 비판할 때 자주 언급되는 욱하고, 감정적이며 한번 성질 나면 물불 안 가리는 성격. 도리어 그것이 한국 발전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된 것 아닙니까? 더구나 한국인들의 시키는 대로 안하고 관행도 무시하고 남 눈치 안보는 태도, 어찌 보면 21세기에 가장 필요한 개성과 창의성, 의욕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닐까요? 그저 명령만 내리면 그대로 따라 하는 로봇 같은 일본인보다는 낫구요."“한국인들의 베짱이 기질은 어떤가?"박교수가 다시 물었다. “세계는 지난 수세기 간에 걸쳐 프로테스탄트식 직업 윤리와 보헤미안식 윤리간에 긴장 관계를 가졌지만 지금은 양쪽이 서로 통합되는 쪽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 한국인의 끼, 놀이 본성, 흥분과 신명, 직관적인 태도를 보면 보헤미안 기질이 더 강한 것 같은데 바로 그런 성격이 21세기에 더 맞는 기질로 작용하는 것 아닙니까한국인은 앞으로 문화?예술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활약을 할 것으로 봅니다." 박교수가 예의 차분한 어조로 설명하기 시작했다.“왜 한류(韓流)는 있는 데 일류(日流)는 없을까? 한마디로 한국인의 성정(性情)이 아시아 각 국에 공감을 불러 일으킨 반면 일본인들의 그것은 별로였다는 것을 방증해주겠지. 지나치게 자신을 감추고 셈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생활에 과연 얼마나 호감을 느낄까? 사람들은 매사 바르고 모범적인 사람에게서 보다 가끔 실수도 하는 보다 인간적인 사람에게서 더 매력을 느끼는 법이지. 일본은 꽃으로 따지면 향기가 없는 꽃이야."“일본 사람들이 매사 바른 편인가요? 그렇다면 과거 그런 만행을 저질렀나요?"김과장이 되물었다. 박교수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일본이야말로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들이지. 아니 과거에 사는 사람들이지. 그러니까 패전의 콤플렉스를 벗어나지 못해 야스쿠니 신사 참배니 뭐니 소란을 펴고 있지. 대중의 갈채를 받는 고이즈미의 행동을 자세히 보면 일본인 특유의 이중적 자세(dual stance)를 알아챌 수 있네." “즉 부시에게 기대서 알랑대는 행동은 전후 맥아더에게 맹목적 충성을 보내던 시절로의 회귀일세. 반면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미국에 맞서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아시아 전역을 손아귀에 넣었던 군국주의 시절의 향수를 그리워하는 표현이고….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가치관과 감정을 함께 소유할 수 있는 타입이 ‘모범생’ 일본이지." 김과장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조셉 나이가 쓴 ‘소프트 파워(soft power)’를 보면 21세기는 총?대포 등 국방력과 경제력으로 좌지우지하던 하드 파워(hard power) 시대가 아니라 문화?예술?기술 등 소프트 파워 시대라고 했네. 쉽게 말해 힘센 인간보다는 매력 있는 인간이 게임을 주도할 거라는 얘기인데 지금 일본이 하는 모습은 영락없이 ‘힘센 인간’으로의 회귀지." 목이 마른 지 박교수는 생수 한 잔을 단 숨에 마셨다. “어찌 보면 콤플렉스에서 먼저 벗어나야 할 나라는 지금 한국보다 일본이 아닐까? 맥아더에게도 기대고 싶고, 천황 폐하에게도 충성 바치고 싶다는 그 양면적 콤플렉스!. 나는 이런 일본을 깊은 우려를 가지며 바라 보고 있다네. 그 양면성으로 인한 긴장감이 언젠가는 충돌하거나 아니면 힘 약한 제삼자에게 발산될 수 있기 때문이지."
나이가 들수록 자기 의견을 절대시하거나 감정에 치우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조심하려고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문재인 정권은 더 이상 아니다!"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신이 싫어하는 대통령·정권·정당이 있어도 이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민주적 시민의 태도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문재인 정권에 대해 비토(veto) 의견을 제시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지금 문재인 정권은 어떤가. 청와대가 행정·입법 체제 위에 군림하며 이젠 사법부까지 장악하려고 든다. ‘3권 분립’이 아니라 ‘3권 통합’으로 가고 있다. 자신들 입맛에 맞지 않으면 국가시스템, 법, 사람, 심지어 역사도 다 바꿔버린다. 첫째, 현 정권은 유사 파시즘(fascism) 정권이다. 노재봉 전 총리의 말처럼 지금 우리나라 상황은 자유민주주의 체제 내 ‘보수 대 진보’의 대립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세력 대 전체주의 세력’ 간 대결구도다.전체주의 국가란 무엇인가. 독일 나치즘, 일본 군국주의, 소련 스탈린주의, 중국마오쩌둥 시대, 북한 공산주의 체제처럼 개인보다 집단의 이익을 강조하며 집권자의 이념과 정치권력이 국민의 전 영역에 걸쳐 절대적인 통제를 가하는 체제다. 그동안 대한민국은 부분적으로 개인 인권이 제한되고 군사독재 시절을 거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주의 노선을 견지해왔다. 도중에 불법과 독재가 자행됐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국민의 뜻에 따르는 순리의 역사로 이어졌으며, ‘한강의 기적’도 이런 상황에서 이뤄졌다.그러나 지금 문재인 정권은 어떤가. 청와대가 행정·입법 체제 위에 군림하며 이젠 사법부까지 장악하려고 든다. ‘3권 분립’이 아니라 ‘3권 통합’으로 가고 있다. 자신들 입맛에 맞지 않으면 국가시스템, 법, 사람, 심지어 역사도 다 바꿔버린다.이렇게 되면 없는 죄는 만들고, 있는 죄는 감춰버릴 수 있다. 실제 대부분 우국충정에서 나온 ‘8·15 광화문 집회’ 참가자들을 집단 범죄세력으로 모는 반면, 대통령의 친구 송철호 울산시장 선거 관련 청와대의 조직적 개입사건 의혹, 조국 일가 비리, 라임 펀드 사태 등 현 정권에서 벌어진 온갖 권력형 비리 수사나 재판이 흐지부지되고 있는 현실이 그렇다.이 과정에 언론과 사이비언론 세력, ‘문빠’가 동원된다. 이들은 현 정권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보도는 거짓으로 치부한 채 사실을 왜곡하고 진실을 조작해 거짓이 득세하는 세상으로 만든다. 12년 전 광우병 사태, 10년 전 천안함 침몰사건, 6년 전 박근혜의 세월호 ‘고의’ 침몰 주장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무오류’ 대통령을 비판하면 ‘문빠’들의 집중공격을 받는다. 마치 1960년대 중국의 홍위병, 1930년대 독일 히틀러 시대의 갈색셔츠단이 연상된다.대통령뿐 아니라 집권세력이 하는 모든 일들이 ‘무오류’다. 경제가 나쁘다는 통계가 나타나면 통계청장을 날리고 계산방식을 바꾼다. 부동산으로 온 나라가 난리가 났는데도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이나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국회에 나와 “정부 부동산정책이 효과를 보고 있으며, 국민 다수가 지지하고 있다"고 발언한다.(지난 8월 25일) 마치 1980년대 초 모든 국가 경제상태 지표들이 ‘성장’ ‘호황’ ‘목표 초과달성’으로 발표되던 붕괴 직전의 구소련 상황이 연상된다. 두 번째는 이 정권의 전술·전략이다. 전체주의 세력들의 정치기술은 적을 설정하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증오와 복수심을 유발시키며 이를 위해 사회 분열과 혼란을 부추기고 여기에 인간의 본능인 시기심을 이용한다. 경제는 더 나빠지고 서민생활이 더 팍팍해질수록 ‘가진 자’에 대한 미움은 더 커진다. 국민이 더 가난해져야 정부 곳간에 의존하는 사람들도 더욱 늘어난다.따라서 지금 비판받는 대부분 경제정책도 그들에겐 실패가 아니라 성공일 수 있다. 부동산정책이 잘못돼 난리가 나면 ‘가진 자와 안 가진 자’의 갈등대립 구도는 더 커진다. 재벌·부자는 물론 아파트 한 채 가진 중산층에 대한 시기심·증오심도 무럭무럭 자란다. 그럴수록 체제에 대한 불신은 커져 타도 대상이 된다. 여기에 한국적 상황인 ‘친일파 편 가르기’까지 가세한다. 지금 기세로는 남의 집 조상묘도 파헤치고 규장각역사 기록도 바꿀 수 있을 것 같다.셋째는 이 정권이 사실상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정권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대한민국 건국일(1948년 8월 15일)도, 이승만·박정희 등 역대 대통령도 인정하지 않으며,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는 데 기여한 정부와 기업, 사회 각계 인사들의 노력도 부정하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서 열리는 ‘6·25전쟁 70주년 특별전’을 비롯, 지난 3년간 현 정권하에서 보인 한국 현대사는 지난 70여년 이 풍진 세상을 살아오면서 대한민국 땅에서 벌어진 온갖 우여곡절에 대해 이해와 치유보다는 부정과 단죄의 관점으로 부각되고 있다.결국 이들의 목적은 무엇인가. 대한민국 정체성을 부정하고 고려연방제든 뭐든 북한과 한 나라로 가자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들이 가자는 길은 기존의 자유민주주의나 시장경제가 아닌 전체주의 및 사회주의 체제일 테고….그러나 대한민국을 태생적으로 좋아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 대통령과 정권하에 있는데도 대통령 지지도는 여전하다. 그토록 많은 실책이 일어나도 여론은 별로 움직이지 않는다. 민주 사회에선 여론을 잡아야 이긴다. 그러려면 고도의 계산에 바탕을 둔전술과 전략, 홍보, 민심 결집능력, 통합력, 정치력 등이 필요하다.그런 의미에서 현 정권의 실정을 비판하기 위해 열린 지난 8·15 광화문 집회는 명백히 전술·전략의 미스였다. 오히려 나라 위기도 아랑곳 않고 당파성에 몰두된 세력이요, 코로나19 사태 확산 원흉으로 몰리게 됐다. 덕분에 막 떨어져 가던 대통령 지지율의 반등을 초래했다. 전광훈 목사 () 현 정권은 지금까지 정권에 가장 격렬하게 맞서온 전광훈 목사를 비롯한 일부 교회 세력과 태극기부대를 이 기회에 잡아버리겠다고 어금니를 꽉 물었다. 전 목사의 언동이나 일부 추종세력의 행태에 공감할 수 없는 점도 많지만 적어도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대한민국 정체성을 인정하는 점에서는 동질감을 느낀다. 그들의 행동이 때로 수구꼴통이고 거칠게 보일지라도 적어도 그들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사실상 부인하고 있는 이 정권 세력과는 확연히 다르다.그렇다면 그들을 내치면 안 된다. 잘못을 설득하고 꾸짖더라도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형제자매, 자식이 미운 행동을 하더라도 포용하는 것이 인간적 도리인 것같이. 전광훈 목사 측도 실수했지만 미래통합당 주호영 대표도 전략적 실수를 범했다. 그들을 껴안아라. 그게 큰 정치지도자의 길이다. 대한민국 존립 여부가 불투명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같은 편 흠만 탓해서는 안 된다. 야당의 사정권 안에 있게 만들라. 그래서 지금 대한민국 국체를 부정하는 정권에 맞서 총연대해 궐기하도록 해라. 그러면 국민들도 다 따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