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말씀대로 우리가 생명을 잃는다면 세상을 다 얻은들 무슨 소용입니까? 모든 것의 시작은 생명(법)이니 생명이 있은 이후에야 나란 생각도 만들어지고 이 몸과 마음도 생겨나며 그로 인해 세상도 인식되어 존재하기 시작합니다.그러므로 나와 세상의 시작(제1원인)은 이 몸과 마음이 아닌 생명(법)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몸과 마음인 자기가 먼저고 그런 내가 생명을 얻어 세상을 살아간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착각분별을 전도몽상이라 하는 거지요.그런데 우리 삶 전체와 생명을 한시라도 분리할 수가 있습니까? 분리되는 순간 바로 죽게 되
깨달음을 방해하는 큰 요인 중 하나가 바로 [관념연속성]의 속임수입니다. [관념연속성]이란 어제 접한 정보와 같은 정보를 오늘 다시 접하면 그 대상은 그동안 계속 그대로 있었다고 상상하는 생각의 능력을 말합니다.열반경에서 부처님은 이것을 중생이 가진 [있음병]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은 오늘 지금 이 순간엔 처음 보거나 접하는 것임에도 우리들은 그 대상을 그동안 계속 있어왔다고 추측 상상하는 마음의 장난유희에 깜빡 속는 거지요.그러니까 진실을 말하자면 오늘아침 일어날 때 옆자리에 있었던 그분은 엄밀히 말해서 이 순간 내 인생에서 처음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 어머니가 야베스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하나님께 아뢰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사 내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역대상 4:9,10)야베스의 기도는 짧은 두 구절에 불과하지만, 축복에 주리고 형통함에 목마른 현대인들에게 마치 가뭄에 단비처럼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종종 좋은 설교 자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그런데 종교학자 제프리 마한(J
나비는 과거를 지고 다니지 않는다. 나비는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을 가볍게 살아갈 뿐이다. 나비는 비가와도 심각하게 근심걱정하지 않는다. 그냥 지금 여기에 이렇게 생생한 생명으로 날고 있다.우주적 생명이 나비란 형상을 통해 지금 날갯짓으로 나타난다. 대다수는 분별심속에 한낱 곤충인 나비를 미물로나 보겠지만. 참진리인 생명은 고뇌로 무거운 인간보다 이렇게 경쾌한 나비의 아름다운 삶에서 더 잘 드러난다.아아! 탐진치에 사로잡혀 살아온 인간의 삶이여! 그동안 그 얼마나 많은 세월을 눈물과 한숨 속에 지냈던가! 생각과 감정이란 놀라운 축복과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다는건 이성적으로 말해 이렇게 표현됩니다. “생명이 일체만물을 만들고 만물 속에서 스스로를 인식했다” 이것을 우린 존재의 자각 또는 현존함이나 깨어남이라고 부르지요.왜 생명은 가만히 좀 계시지 이렇게도 길고 복잡한 여정을 시작했을까요? 그건 성경에도 니왔듯이 생명(하나님)이 스스로 좋았기 때문입니다. 좋았다는 것은 달리 말하자면 [재미있다]는 말입니다.사실 살아있는 생명으로선 가만히 있는 게 오히려 답답할 노릇입니다. 살아있다면 사실 눈이라도 깜빡거리고 손가락이라도 흔들어 봐야지요. 그래서 나중엔 이런 짓이
당신이 진정 마음의 눈을 뜬다면 분명히 보시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게 다 이걸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기독교는 이걸 하나님이라 부르며 불교는 부처라고 부를 뿐입니다. 이걸 [한님], [참생명]이라 부를수도 있지요.사실 삶의 모든 것들은 다 항상 이걸 가리키고 있습니다. 좋고 나쁜 일이든, 걱정근심이든, 쾌락이든 고통이든 모든 것 일체는 다 해탈과 구원의 문인 이것을 보여주고 있지요.하지만 우리는 가장 크고 소중한 이것을 보지 못하고 늘 가장 작은 것들만 쫓아다니며, 영원한 이것을 보지 못하고 끝없이 생멸하는 눈앞의 일시적인 것들만
마음공부의 과정은 내면에 바른 질서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나라가 안정되려면 현명한 왕과 충성스런 신하와 근면한 국민이 있어야 하듯이 마음도 스스로 자기의 왕(부처,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신하가 되어 일상생활이란 국민(이것은 행주좌와 어묵동정의 모든 언행을 말함)을 다스리는 것입니다.고로 무엇(누구)이 왕인지를 먼저 발견해야하며 왕을 발견하면 마음은 최선을 다해 그를 보필하여야합니다. 이것을 마음공부에서는 깨어난 후의 보림과정이라 합니다. 그래서 왕이 점점 더 강력한 권한을 갖게 하여 마침내는 모든 일상 속에서 항상 왕이 깨어서
정견을 하면 할수록 더 밝게 깨어나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은 모든 것은 다 이 생명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꿈같은 환영이란 겁니다. 자기 의식이 없는데 세상이 따로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심지어는 나란 생각이나 느낌조차도 의식이란 바탕 없이는 있을 수가 없지요. 내가 의식이 없는 동안에도 세상은 그대로 있다는 건 자기 생각일 뿐입니다. 의식이 돌아와 활동하지 않는 한 세상은 영원히 내겐 없습니다. 심지어 나와 사랑하는 사람들조차도 의식현상 안에 나타난 모습들입니다.그러므로 나와 세상은 이 생명의식 안에 일어나는 영화 같은 환상들입
우리가 익혀온 생각은 쉴 새 없이 작동하며 마음속에서 속삭입니다. 하다못해 가만히 쉴 때라도 생각은 못마땅한 듯 바라보면서 한마디 합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시간낭비만 말고 뭔가를 해야 되지 않겠어? “그래서 우리는 그 생각 따라 무슨 공부를 하거나 자기 문제를 또다시 분석해봅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해선 공부는 공부대로, 문제는 문제대로 별진전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만히 있질 못합니다. 생각이 가만 내버려두질 않으니까요.이게 많은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간법의 방식입니다. 즉 우리들은 [나는 이런 문제들을 갖
세상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가족이고 대다수가 가족을 위해 산다고도 하는데 그로부터 해탈하라니 대체 뭔 소리냐 하실지 모릅니다만 사실은 오히려 그래야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더 바로 보게 되며 이상적인 관계와 사랑을 할 수 있게 됩니다.사람은 몸, 마음, 영(神靈)으로 되어있다고 할 수 있는데 가족이란 몸을 중심으로 혈연으로 엮어진 관계입니다. 물론 같이 매일같이 가깝게 지내다보니 마음도 서로 강하게 엮어져 있지만 자세히 보면 대부분은 애증(愛憎)에서 출발한 탐진치입니다.애증으로 강하게 묶인 관계란 서로 집착과 기대요구가 클 수밖에
2023년 계묘년이 저물고 2024년 갑진년이 밝아온다. 한 해를 떠나보내자니 끝과 시작의 감회가 새롭다. 땅끝 해남은 한반도 땅의 시작 지점이기도 하다. 끝과 시작이 반드시 다른 것은 아닐 거라고 마음에 새겨본다.◇ 끝은 또 다른 시작해남의 큰 가람인 대흥사 입구에는 '아홉 숲의 긴 봄'으로 불리는 걷기 길이 있다. 십 리 장춘(長春) 숲길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산사 가는 길'이다.부안 내소사 전나무 숲길, 양산 통도사 무풍한송로, 평창 오대산 선재길, 순천 선암사 진입로 등과 함께 지역민과 관광객의 사랑을 받는 불심 길이다.장춘
신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현대인들은 쉽게 실존적 공허감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사이비 종교나 알코올, 마약 중독에도 쉽게 빠질 뿐만 아니라 감각적 쾌락에도 쉽게 빠진다.그러나 인간은 아싸지올리가 말하는 상부무의식의 요소, 즉 영성(spirituality)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그래서 실존적 공허감에서 벗어나는 어떤 길을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 답을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 즉 불교에서 실존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한다.그러면 인간 실존에 대한 붓다의 깨달음은 어떤 것인가?붓다는 힌두교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예로부터 종교분야엔 특히나 더 사이비가 많았습니다. 사이비들의 특징은 겉으로는 자기들이 최고의 진리복음(福音)이라고 그럴싸하게 주장하지만 내면적으론 지도자의 신격화, 조직적 억압과 금품강요, 성폭력들이 반드시 숨겨져 있다는 겁니다.하지만 그런 것보다 더 큰 사이비는 겉으로 보면 멀쩡한 큰 종교소속의 단체이지만 그 가르침이나 신앙부터가 진리를 잘못 해석하여 그것만이 진짜인 듯 맹신추종하는 것입니다. 즉 맹인이 맹인을 이끌다보니 결국 다 같이 허송세월하고 많은 정진과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헛된 인생을 만들어버리는 것이지요.[큰 데니까
# 마음수행을 오래 한 이들에게 최고의 마음 상태는 완전한 평화(peace), 지고의 행복감(bliss), 충만한 사랑(love)의 감정이라고 한다. 임사체험을 겪거나 신비체험을 한 사람들도 대개 그런 마음상태를 표현한다.그렇다면 최악의 마음상태는 무엇일까. 경험 많은 정신과 의사들은 주저 없이 수치심, 죄책감을 1순위로 꼽는다.특히 우울증 환자들에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패턴으로 처음에는 슬픔·비탄·허무·후회·불안·분노 등의 감정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다, 점차 아무 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증을 거쳐 종국에는 죄책감, 수치심이 지배하면서
삶에 의미와 목적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거나 찾는다면 그대는 벌써 갓난아기의 눈망울 같은 순수한 신의 품을 떠나 생각 속에서만 분리된 개체(에고)로서 존재하기 시작한 것이다.이제 그대에겐 나(아상)란 개체성을 자각하는 고독한 분리감과 그를 해소하기위해 찾거나 해야 할 일이 생겨난 것이다.세상의 모든 종교는 천국과 열반 같은 것을 목적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그런 것에 집착하고 무의식적으로 따라가는 한 그대는 꽃으로 치장된 생각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다시 말해 그대는 종교라는 정신적 구조물에 갇힌 것이다. 물론 그런 구조는 마음의 평안
삶이 이렇게 힘들고 무거운 이유는 내가 짐 지며 꽉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앞에 걱정근심거리를 어떻게 잊거나 다 내려놓을 수가 있냐구요? 잊으란 것도 아니고 걱정거리 생각, 느낌, 감정과 싸워 이기란 말도 아닙니다.마음에 걱정근심거리가 내 힘으로 다루기 힘들어질 때 기독교에선 하나님을 믿고 내어 맡기라 하며 불교에선 법의 힘을 믿고 몽땅 다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알고 보면 내어맡기나 내려놓으나 그 말이 그 말입니다.깨나보면 하나님이나 법이나 사실은 다 관념이며 이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핵심은 내 생각, 감정 속에서 그걸 상대로 나
깨어 있으려면 누가 무엇을 대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상적 경험만 따라가지 말고 대상이 어디에서 생기고 사라지는가를 알아차려 보세요. 거기엔 아무 대상도 없는 텅 빈 의식(앎)이란 비대상적 경험만이 있습니다.이것을 존재, 참나, 생명, 순수의식이라 부를 뿐입니다. 모든 것을 두루 비추지만 결코 자기를 대상으로는 드러내지 않는 거울처럼 내 몸과 세상조차 대상으로 인식하는 이[앎]은 결코 대상화되지 않는 비대상적 경험입니다.이 [앎]은 어디에서 투사되어 나오고 밤엔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요? 마치 영화관의 영사기가 투사하는 빛처럼
당신이 자기 생각에 속는 게 아닙니다. 당신의 본래면목은 그냥 그대로 가만히 있는데도 가만히 있질 못하는 자기 마음이 스스로 만들거나 받아들인 생각에 속는 것입니다.간단히 말하자면 생각이 생각한테 서로 속이거나 속는 것이지요. 당신의 생명이자 법신자리는 그 생각들을 비추며 여여하게 잘 있습니다.생각이 이리저리 뛰놀든 괴로워하든 뭘 하든 간에 전혀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영화관의 빛이나 스크린이 영상에 물들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그러므로 자기 생각에 속지 않으려 애쓰거나, 생각을 끊으려 하지마세요. 당신은 영화영상이 아니라 본
자각몽과 깨달음은 그 구조가 매우 유사합니다. 자각몽을 꿀 때 우린 꿈속의 모든 일이 다 꿈인 줄을 분명히 압니다. 누가 압니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일체를 보고 아는 자리가 있습니다.자각몽 속에서 우리는 모든 대상과 일들이 다 실재가 아닌 줄 압니다. 실재(實在)가 아니므로 헛되며 공(空)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니므로 자각몽은 일정기간 스스로도 존속합니다.현실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모든 대상과 일들이 다 꿈처럼 실재가 아님을 압니다. 하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니므로 현실은 삶이란 일정기간
해탈(解脫)하면 어떻게 될까요?내가 하는 모든 생각, 감정, 느낌(오온)으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나 있습니다. 생각을 안 한다거나 감정, 감각, 느낌이 전혀 없다는 게 아닙니다.다 있는데 그 본질이 텅 비어있음을 늘 보기에 마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생각이나 감정, 느낌의 내용물도 나를 흔들지 못합니다. 마치 안개나 수증기가 허공에 잠시 부유하다가 사라지듯 할뿐입니다.끝없는 텅 빔의 자리가 일체를 더 밝게 잘보고 들으며 느낍니다. 해탈의 세계는 항상 밝은 빛이 삼라만상을 품고 있는 것과 같고 늘 젊은 생명의 생동감이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