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심에 중독된 우리는 아침에 눈만 뜨면 바로 나와 대상을 나누고 그 대상이 무엇인지부터 번개같이 분별한다   /셔터스톡 

갓난아기의 의식세계 속에서 생명은 본래부터 통째 하나로 살아있습니다. 왜냐면 본래 그렇게 태어났으며 아직 분별에 의해 세상이 주체(나)와 객체(대상)로 이원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단지 아기는 세상의 근원이 되는 자기 생명의식을 스스로 자각하는 것조차 모를 뿐입니다.

그러나 자라나면서 우리는 생각으로 이것과 저것을 분별해 나누는 걸 배웠지요. 그리고 그 분별심은 무럭무럭 자라나 이젠 세상을 온통 따로따로 다 갈라놨습니다.

그 결과 우리 모두는 지금 이처럼 몸을 갖고 사는 삶에는 잘 적응하게 되었지만 그 대신 수많은 본래 없는 생각과 감정, 감각 속에 갇혀서 고통받게 된 것입니다.

석가는 최초로 세상의 실상은 인간이 생명을 가진 게 아니고 본래 있던 진화과정에서 생명이 인간이란 생물체로 세상에 나타난 것임을 간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생명의 기능인 오온(생각, 감정, 감각)을 활동하더라도 항상 그 본질을 보면 그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와 깨달음의 핵심 요체입니다. 이제 너무나 깊이 분별심에 중독된 우리는 아침에 눈만 뜨면 바로 나와 대상을 나누고 그 대상이 무엇인지부터 번개같이 분별합니다.

물질세상은 분별을 잘 할수록 더욱 똑똑해지고 잘 살 것이라며 분별을 권장하고 추켜세웁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본래 통째 하나인 이 [살아있음]의 생명자리를 잊었습니다. 그 결과 자기의 본성과 참다운 정체성을 모르게 된 인류문명은 어지러워지고 쾌락과 소유욕에 흔들리게 된 것입니다.

사실 대상이란 것은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실상세계에선 모든 건 다 하나로 잘 어우러져 있습니다.

이제 이런 생명의 신비를 되찾고자하는 우리는 그래서 문제해결의 열쇠를 바로 [대상을 분별하는 분별심의 일시적 환영성]을 봄에서 찾아야 합니다.

즉 깨달으려면 나와 대상으로 나뉘는 순간을 포착 정견함으로서 깨어있어야 합니다. 왜냐면 주체와 객체(대상)은 본래 없던 일시적 환영이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해서 마음이 늘 대상에 가있지 않게 되면(설사 잠시 필요상 갔어도 즉각 돌아온다면) 마음은 스스로 세력을 형상하지 못하고 사라지게 됩니다.

이걸 에고의 죽음 또는 개체마음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거지요. 그리고 그 자리엔 항상 밝고 텅 비었으되 활발발하게 살아있는 생명의식이 서서히 드러납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이렇게 본래 통째 하나로 살아있는 생명자리를 자각하고 다시 본래자리를 회복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갓난아기는 갖지 못한 어른의 지혜, 즉 오온을 활용하여 물질과 정신세계를 걸림 없이 총괄하면서도 늘 모든 차원에 자유롭게 깨어있는 신(부처)의 존재방식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부인은 항상 자기가 지금 대상에 정견함(앎)없이 끌려가느냐, 아니면 뭘 해도 걸림 없이 자유롭고 평안한 상태에서 흔들림 없이 그 대상의 일시적 환영성과 작용성을 보고 사용할 뿐이냐에 집중해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럴수록 [통째 하나로 살아있는 생명]자리가 점점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글 | 김연수 한양특허 대표

서울대학교 미대를 다니다가 진리를 얻기 위해 출가했으나 세상으로 돌아와 전문 직업을 구해 변리사가 되었다. 지금은 직원 백 명이 넘는 <한양특허법인>의 대표 변리사로 수십 명의 변리사, 변호사와 함께 글로벌 기업들의 지적재산권 업무를 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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