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최대 폭군인 연산군의 생모 폐비윤씨는 일반적으로 교만하고 악독한 성정의 여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서울 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장을 역임한 김창윤 교수는 이른바 전형적인 ‘조울증(양극성 장애)’환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한다.

김교수가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폐비윤씨의 행동을 정신과적 측면에서 분석해 쓴 <폐비 윤씨와 양극성 장애>란 제하의 논문을 소개한다.

소개하는 이유는 정신적 질환이 한 사람의 인생과 주변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엿볼 수 있으며, 특히 산후우울증을 가볍게 여기지말고 주변에서 각별한 관심을 쏟아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이 논문은 폐비 윤씨의 조울증 가능성을 밝힌 최초의 연구이며 최근 대한신경정신의학회지에 발표됐다. <편집자 주>

◇ 폐비윤씨(구혜선 분) 의 일대기를 다룬 sbs TV 드라마 '왕과 나'.   *사진=sbs 화면 캡처 
◇ 폐비윤씨(구혜선 분) 의 일대기를 다룬 sbs TV 드라마 '왕과 나'.   *사진=sbs 화면 캡처 

폐비 윤씨와 양극성 장애

흔히 악녀로 묘사되는 성종의 계비이자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廢妃 尹氏) 이야기는 종종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로 접할 수 있다.

성종 4년에 후궁으로 간택되어 3년 뒤 왕비로 책봉된 윤씨가 왜 폐비가 되어 사약까지 받아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 윤씨의 질투와 이에 따른 부덕한 행동이 폐출의 주된 원인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윤씨가 원래 늘 행동에 문제가 있던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중 「성종실록」을 살펴보면, 윤씨는 성종과 대비들의 간택으로 왕비가 될 때까지 특별한 문제 행동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폐비 윤씨가 연산군 출산 후 보인 지나친 질투와 비상식적인 행동은 정신 질환인 ‘양극성 장애’*를 떠올리게 한다.

* 양극성 장애(조울증)란, 기분이 들뜨는 것이 지나쳐 자존감이 고양되어 자기주장이 강해지고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는 조증 상태와 마음이 너무나 가라앉아 무기력하고 수면이 늘어나는 등 우울 상태를 주기적으로 겪는 질병이다. <편집자 주>

실제 폐비 윤씨가 정신 질환의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지만 관련 문헌을 찾아보고 폐비 윤씨가 정신질환이 있는지, 구체적으로는 양극성 장애에 부합되는지 검토해 보았다.

폐비 윤씨 발병 전 성격

「성종실록」에 따르면 윤씨는 어릴 때부터 베를 짜서 팔아 어머니를 봉양해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효성 덕분에 입궁의 행운이 찾아왔다고 사람들은 이야기 하였고 이는 윤씨가 생활력이 강하고 효심 있는 여성임을 짐작하게 한다.

후궁으로 입궁한 윤씨가 성종 비인 공혜왕후가 죽자 왕비로 책봉(성종7년,1476년 8월9일)된 이유도 당시 윤씨가 회임중이기도 하였으나, “성종이 중히 여기고, 윤씨가 검소한 것을 숭상하며 일마다 정성과 조심성이 있어 대사를 맡길 만하다”는 것이었다.

윤씨가 원자(훗날 연산군)를 잉태했을 때 기록에도 당시 그녀의 품성은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마음가짐도 깊고 곱다고 표현하고 있다. 또 효성도 지극하여 정희왕후, 안순왕후, 인수대비 등 삼대비를 감동시켰다고 했다. 윤씨를 왕비로 책봉한 날의 기록에도 “분수에 넘치는 일이라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는 윤씨의 겸손함이 잘 드러나 있다.

기분장애를 시사하는 임상 양상

폐비 윤씨가 양극성 장애를 앓았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기록은 「성종실록」의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윤씨는 왕비에 책봉된 지 8개월 만에 왕자(연산군)를 출산했다(성종 7년, 1476년 11월7일).

그런데 불과 4개월 뒤, 왕비 윤씨가 다른 후궁을 질투하여 사람을 독살할 수 있는 비상과 굿하는 방법이 있는 책을 가지고 있다가 발각 되었다. 이러한 과도한 질투는 경조증에서 비롯된 행동으로 볼 수 있다. (윤씨의 정신이상적 증세가 본격화된 것으로 보인다/편집자 주)

결국 이 사건으로 윤씨는 빈으로 강등되어 별궁에 거처하게 되었지만 “중궁이 편찮으니 회례연을 정지하라”, “회복되었으니 풍악 1등을 내리라”는 기록과, 약 2년 후(성종 9년말~10년초) 윤씨가 두 번째 왕자를 출산했다는 사실에서 성종과 윤씨의 관계가 다시 빠르게 회복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출산 후 생긴 윤씨의 경조증이 호전되었을 가능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둘째 왕자를 출산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성종 10년 6월) 윤씨는 성종이 후궁과 잠자리를 하고 있는데 침실로 불쑥 들어가는 행동을 한다. 자신의 욕구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부적절한 행동을 한 상태로 조증 증상을 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에서는 “처음에 원자를 낳아 임금의 사랑이 두터워지자 교만하여 여러 후궁을 투기하고 임금에게도 공손하지 못하였다.

어느 날 임금의 얼굴에 손톱자국이 났으므로 (중략) 윤비를 폐하여 사제로 내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외에도, 독약을 품고 사람을 해치려 하고 성종에게 “발자취 찾아서 없애버리겠다”고 말하거나 대비들의 가르침에도 들으려하지 않고 성종과 대비 탓을 하며 위협하였다.

또, 성종이 거처하는 곳의 장막을 가르키며 ‘소장’(장사 지낼 때 쓰는 흰 휘장)이라 하며 스스로 상복을 입는 등 무례한 행동과 자기 주장이 강한 모습, 예민함을 보이는 경조증 혹은 조증 증상을 보인다.

뿐만 아니라 아침에 임금이 정사를 보러 나가는데도 일어나지 않고 다녀온 후에나 일어났다는 기록도 있어 무기력하고 수면이 늘어나 아침에 일어나기 힘든 비전형적 우울증 양상도 보인다.

폐비윤씨의 가족력

폐비 윤씨의 직계 가족들을 중심으로 정신과적 가족력에 대해 조사하여 유전적인 요인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윤씨가 죽임을 당하고 아들 연산군 또한 왕위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출생사항이나 생애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으며 윤씨의 아버지 윤기견이 단종에게 불당 철거를 요구하다가 좌천되었다는 기록 외에 문헌에서 그녀의 가족들의 정신병력은 특별히 찾아 볼 수 없었다.

「연산군 일기」를 살펴보면 성종과 윤씨의 맏아들인 연산군 역시 기분 삽화가 반복하며 기이한 행동을 보인 기록이 있으며 이는 양극성 장애의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한다.

모호한 신체증상, 우울한 기분, 자주 눈물을 흘리는 행동, 식욕 저하, 불면, 기운 저하 등은 우울 증상의 가능성을 나타낸다.

“밥을 먹어도 맛이 달지 않고 잠을 자도 편하지 않고 구정물을 마신 것 같다”,“나도 모르게 슬픔이 마음속에 핍박하여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는 기록은 우울증을 시사하는 예로 들 수 있다.

또 연산군은 성적 문란, 사치, 유흥과 사냥에 집착, 과도한 처벌, 지나친 흥분과 분노 표출 등 경조증 혹은 조증이 의심되는 증상도 보였다. 이러한 조증과 우울 증상이 수개월 이상 지속되다가 완화와 재발을 반복하는 것을 볼 때 연산군 역시 양극성 장애를 앓았을 가능성이 높다.

폐비 윤씨가 후궁들 및 대비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폐위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성종실록과 관련된 문헌들을 통해 확인한 임상 양상과 가족력을 볼 때 폐비 윤씨가 양극성 장애를 앓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종합해보면) 윤씨는 왕비가 되기 전까지는 성격에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연산군을 출산하고 4개월 후부터 지나칠 정도의 질투와 후궁을 음해하려는 행동을 하는 등 경조증이 의심되는 증상을 보인다.

이후 비교적 증상이 좋아지면서 성종과의 관계도 회복되었고 두 번째 왕자도 출산하였다. 하지만 둘째를 출산하고 대략 6개월 전후로 비상식적 행동과 말이 많아지고, 왕에게 순종하지 않고 무례하고 공격적인 행동, 자극 과민성, 충동 조절의 어려움 등 조증 삽화에 부합하는 모습을 보인다.

반면 임금이 정사를 보러 나가는데도 일어나지 못하는 모습은 양극성 장애의 우울증을 시사한다. 이런 우울 및 조증 증상이 간헐적으로 나타나고 증상이 있을 때와 없을 때가 뚜렷하며, 완화 시기에는 정상적인 기능을 보여 성격적인 문제보다는 양극성 장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또한 폐비가 논의된 시점이 연산군을 분만한 후 4개월이 지난 시점이고, 증상이 다시 악화되어 궁궐을 쫓겨나는 시기도 둘째를 분만하고 대략 6개월 전후로 추정할 수 있다. 이렇게 분만 후 나타나는 기분증상은 양극성 장애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한다.

◇ 양극성 장애에 걸릴 경우 희비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등 다중적 인격장애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행동을 정상인의 관점에서 해석하면 '이해불가'다. 
◇ 양극성 장애에 걸릴 경우 희비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등 다중적 인격장애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행동을 정상인의 관점에서 해석하면 '이해불가'다. 

현재 산후 기분장애는 일반적으로 출산 후 3-6개월 안에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다. 산후 정신병은 산후 기분장애의 가장 심한 형태로 보고 있다. 우울증과 조증의 기분 증상이 가장 두드러지며, 혼동, 당혹감 등이 동반되기도 한다. 산후 정신병은 약 50%에서 첫 아이의 출산, 비정신과적 주산기 합병증, 기분장애의 가족력이 있다.

산후 우울증의 과거력이 있는 경우, 다음 출산에 재발할 위험도 증가된다고 한다. 덴마크의 한 연구에서 산후 기분장애로 병원을 찾았던 여성은 기분장애가 없었던 여성에 비해 몇 년 내에 기분장애 발생 위험이 6.6배나 높았으며 둘째 출산 후 다시 산후 기분장애를 겪을 위험은 46.4배나 높은 결과를 보였다.

출산 후에 양극성 장애 혹은 기분장애가 잘 생기는 원인이 명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주로 성호르몬의 급격한 변화와 관련이 있다고 보고되어 있다.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은 뇌 발달 및 신경전달물질 시스템 조절과 같은 뇌기능의 여러 측면에서 관여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양극성 장애는 세포 내 신호 전달 시스템에서 이런 성호르몬들의 비정상적 조절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본 연구는 역사적 자료가 「성종실록」 등으로 제한되어 있고 폐비 윤씨는 폐출되어 남아있는 기록이 더 적지만 제한된 기록에서도 폐비 윤씨가 양극성 장애 가능성이 있음을 충분히 뒷받침 할 수 있다.

폐비 윤씨의 죽음을 합리화하기 위해 부정적인 말과 행동만을 부각시켜 기록했을 수도 있지만 아들 출산 후 증상이 심해지는 양상이 일관되게 기술되어 있으며 기분 삽화가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전체적으로 현대에 사용하는 진단 기준에 비교적 부합하는 임상 양상도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대적인 시각에서 폐비 윤씨의 비상식적이고 이해하기 힘든 행동들은 양극성 장애의 증상으로 볼 수 있다. 폐비 윤씨의 문제는 단순히 한 개인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비극적 사화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정신질환에 대한 이해와 치료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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