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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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 오후 산과 어우러진 해변을 산책한다. 지는 해의 투명한 빛이 바다와 어우러진 나지막한 산 능선의 나무들을 황금빛으로 투명하게 비추고 있다. 툭 터져나간 청담색 바다에서 하얀 물결을 얹은 파도가 상큼한 바람과 함께 밀려온다.

밤이 오기 직전 바다와 하늘에 번지는 파스텔 색조의 짧은 황혼은 신비한 아름다움의 극치다. 마지막 잔광과 어스름이 서로 몸을 섞는 광경을 보면서 나는 황홀한 자유를 느낀다.

그리고 잔잔한 행복을 느끼면서 나의 방으로 돌아오면서 실버타운의 한 노인의 말이 떠오른다. 인생도 황혼에서 밤이 되기 전의 짧은 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흔살이 된 그 노인은 미국에서의 오십팔년의 생활과 재산을 놔두고 동해 바닷가의 실버타운 구석의 소박한 방을 얻어 은자같이 살고 있다.

그 노인은 나이를 먹는다는 건 좀 더 깊이 볼 수 있다고 내게 말했다. 맑은 녹색의 속이 들여다 보이는 투명한 바다, 하얀 눈이 덮인 푸른 소나무의 청초함, 수많은 빛이 구름을 물들이는 아름다운 하늘을 세상에 휩쓸려 살 때는 볼 수 없었다고 했다.

나는 바닷가에 와서 은퇴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있다. 프로의 세계는 은퇴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변호사라는 전문직은 누가 강제로 무대에서 쫓아내지 않는다.

변론을 하고 사무실에서 준비서면을 쓰다가 죽으면 나름대로 보람찬 인생이라는 생각을 해 왔다. 그러다가 생각이 조금씩 변해가는 걸 느낀다.

선배 변호사 중에는 매일같이 양복을 입고 사무실에 출근해 소파에서 신문을 손에 들어야 마음이 안정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늙은 변호사에게 더 이상 돈을 주고 사건을 맡기려고 오는 의뢰인들이 없다. 그런데도 그는 하루 종일 책상 앞에 말없이 앉아 있다가 해가 질 무렵이면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자기가 평생 앉아 있던 의자와 쓰던 책상을 벗어나기 두려워한다. 어느새 그는 의자가 되고 책상 자체가 되고 말았다. 그 변호사를 보면서 말뚝에 쇠사슬로 매어놓은 아기코끼리를 떠올린다. 코끼리는 다 커서 그 사슬이 풀려도 그 자리를 떠날 생각을 하지 못한다. 

어제 우연히 유튜브 화면에서 팔십대 원로 탈랜트 김혜자씨의 인터뷰 장면을 봤다. 그녀의 얘기 중에 이런 말이 뇌리에 와서 박혔다.

◇ 배우 김혜자(1941~)     *출처=tvN
◇ 배우 김혜자(1941~)     *출처=tvN

“옛날에 잘 외워지던 대사가 이제는 두 번 세번해도 외워지지 않아요. 그래도 외워지는 게 감사해요. 내가 앞으로 외워질 때까지 연기를 할 거예요. 나는 연기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왔어요. 여자로서 살림도 할 줄 몰라요.”

평생 자기일에 전념하는 그녀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동시에 인생 황혼 밤이 오기 직전 짧은 틈을 내서 모든 걸 내려놓고 어릴적 보던 밤하늘의 별을 다시 보면서 느끼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어령 교수가 대학에서 퇴임하는 소감을 쓴 글을 읽었던 적이 있다. 낙엽이 되면 아직 윤기가 있을 때 빨리 나뭇가지에서 떨어져야 지나가는 소녀의 책갈피에라도 들어갈 수 있다고 문학적인 표현을 했다. 새잎들이 돋아나는데 혼자만 쭉쟁이로 남아 있는 건 흉하다는 것이다. 

일정한 순간이 되면 세상의 하던 일을 내려놓고 새로운 기쁨을 찾는 궤도 수정도 괜찮은 일이 아닐까.

오래전 사업으로 성공했던 한 노인을 본 적이 있다. 그는 일정한 나이가 되자 단호하게 하던 일을 접었다. 그리고는 그 다음 날부터 부부가 아침에 집을 나섰다. 그는 매일 자기와 아내가 써야 할 일정액의 돈을 정했다. 작은 액수가 아니었다.

그 돈으로 명품을 사도 좋고 호텔에서 좋은 음식을 먹어도 공연을 봐도 괜찮다. 자기가 하고 싶은 곳에 기부를 하는 것도 환영이었다. 다만 하루에 쓰기로 한 돈은 남기면 안 되는 것으로 부부가 정하고 실천했다.

그 사업가 노인은 십년 동안 그렇게 실천을 하다가 저 세상으로 건너갔다. 돈을 모으고 쌓아두려고만 하지 말고 인생 말년에 그렇게 쓰는 것도 괜찮겠구나 하고 배웠었다. 

실버타운의 한 노인이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었다.

“은퇴는 새로운 즐거움을 맞이하는 겁니다. 허접한 사람보다 하나님과 이야기 하는 시간이 많아지죠. 연기가 피어나는 부정적인 뉴스보다 진리를 배우는 일이 많아지는 것 같아요. 의미 없는 교제들이 사라지고 성실한 친구와만 사귈 수 있어요. 은퇴는 이익이지 손해는 아니예요.”

글 | 엄상익 변호사

경기중-고, 고려대 법대를 나오고 제24회 사법시험(1982)에 합격했다. 6공 때, 국정원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 특별보좌관실에 근무하며 권부의 이면을 보았다. 변호사를 하면서 ‘대도 조세형’, ‘탈주범 신창원’ 등 사회 이목을 끌은 대형사건 피의자들을 변호했다. 글쓰기를 좋아해 월간조선을 비롯, 조선-중앙-동아일보 등에 칼럼을 연재했고 수필집, 장편 소설 등 1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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