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옥수역  *출처=위키백과
◇ 옥수역  *출처=위키백과

어둠이 짙은 묵호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왔다. 옥수역에서 환승을 위해 긴 통로를 걸어갈 때였다. 젊은 사람들이 정신없이 뛰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까까머리 소년시절 독서실에서 나와 마지막 버스를 타기 위해 그렇게 달린 기억이 그 광경에 포개진다.

지하철에 올라 구석자리에서 그 내부풍경을 보았다. 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모두 봄에 뾰족뾰족 솟아오르는 새싹 같은 느낌이다. 나 혼자만 늦가을 혼자 남은 낙엽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도 젊었었는데.

내 나이 스무살땐 칠십노인이 된다는 걸 상상하지 못했다. 영원할 것 같은 젊음이 어느 순간 안개같이 사라져 버리는 것도 몰랐다. 집으로 돌아가는 젊은이들의 표정을 살펴본다. 환한 얼굴이 별로 없다. 다들 피곤하고 지친 얼굴이다.

나도 그랬다. 입시 걱정, 일자리 걱정, 돈 걱정, 집 걱정 등 지고가는 등짐에 억눌려 힘이들었다. 그 끝은 어딜까?

어제 그 친구가 죽었다는 부고장을 카톡을 통해 받았다. 고등학교 시절 그와 같은 반이었다. 그는 성실 그 자체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을 가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믿음이 독실한 친구였다.

돌아와 국내의 한 연구소에서 일하면서 고교동기들로 된 작은 믿음의 단체를 이끌었다. 그 중 누가 아프기라도 하면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가서 기도를 해주는게 취미 같아 보였다.

몇 달전에 그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내게 염증이 생겨 항암치료가 불가능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잠도 잘 수 없고 먹을 수도 없고 배설도 되지 않는다고 호소해 왔다. 나는 그가 갑자기 매몰사고를 당해 땅 속 깊숙이 갇혀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때 땅 위에서 누군가 계속 신호를 보내주면 위로가 되듯이 그에게 카톡으로 글과 사진을 보내주었다. 그는 내가 보내는 바다사진이나 글들을 병상에서 꼬박꼬박 읽었다.

어느 날부터 내가 보낸 그림이나 글을 보지 않았다. 그의 아내가 대신 글을 보냈다.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겼는데 더 이상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다 부고장이 날아왔다. 아내와 아들 딸 며느리와 사위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걸 보면서 "아, 이제 우리는 죽어도 되지 않나?"하는 생각도 들었다.그가 죽으면서 생긴 풍성한 열매들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식들을 통해 영생하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몇 개의 암이 겹쳐 수술과 투석을 하면서 버티고 있던 친구가 힘든 몸을 이끌고 문상을 하고 나서 내게 이렇게 전했다.

‘내가 암에 걸렸다고 기도해 주던 친구가 자기가 먼저 죽어버렸네’

그는 허공에서 떨어지듯 그렇게 갑자기 죽어버렸다. 해지기 직전 잠시의 황혼같은 노년의 여유로움을 즐기지 못했다. 욕심많고 악한 사람들이 더 오래 잘사는 것 같았다.

*출처=셔터스톡
*출처=셔터스톡

‘이건 아니잖아요?’

내가 속으로 그분께 항의했다. 그런 나의 생각을 반박하는 듯 내면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어째서 불평하는가? 그 친구나 너를 이 세상에서 내보내낸 건 내가 아닌가? 배우를 무대에 세운 연출자가 그 배우를 내려오게 하는 게 잘못이란 말인가?’

‘그래도 무대에 올리셨다면 그래도 맡은 역할을 끝까지 잘 하게 하셔야지 단역 정도 맡기고 중간에서 내려오게 하시면 됩니까? 주인공은 못되더라도 인간이란 다 인생 무대에서 나름대로 역할을 맡고 끝까지 가고 싶은 게 아닙니까?’

‘그 단역만으로도 중간에 내려오더라도 충분한 연극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건 자네가 아니라 연출자인 나일세. 고용하고 해고하는 나의 재량이 아닐까? 자네들이 역할을 받아들이고 무대에서 흡족하게 내려오면 나도 연출자로서 흡족한 미소를 보낼걸세.’

‘인간의 인생을 무대에 비유하셨는데 그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인생을 즐기고 일을 즐기고 살아 있다는 사실을 그저 최대의 특권으로 여기는 한 사람의 인간이 되게. 그게 연출자인 나의 뜻이네’

밤늦은 지하철 안에 앉아 젊은이들이 모두 스마트 폰 화면에 빠져있다. 그들이 살아있고 젊다는 특권을 누리고 있는 걸 알까 생각해 봤다.

저작권자 © 마음건강 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