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묵고 있는 실버타운의 목욕탕에는 때를 밀어주는 분과 이발사가 있다. 두 사람 다 나이가 육십대 중반은 넘은 지긋한 나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마치 노동이 취미라도 되는 듯 조금만 시간이 나면 다른 일을 한다.

실버타운의 잔디를 깎기도 하고 쓰레기를 치우기도 한다. 더러는 밭에 심은 감자를 수확해 내게 주기도 했다. 내가 때를 밀어주는 분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열심히 노동을 합니까?”

갑자기 그가 표정이 근엄해 지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도인들에게는 노동이 수행하는 방법입니다.”

그는 민족종교를 믿고 있다고 했다. 노동이 수행으로 바뀌는 순간 질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 같기도 하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불교에서도 기독교에서도 노동을 신성시하고 있다. 기독교의 한 성자는 그가 쓴 책에서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노동은 고역이라고 말하지만 내게 노동은 쾌락이다. 나는 돈으로서의 보수가 없더라도 노동을 할 수 있다. 나에게 세상에서의 최대의 쾌락은 날마다 하는 나의 노동이다.”

사도 바울은 조용히 살도록 힘쓰며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제 일을 하라고 했다. 묵묵히 일해서 자기 양식을 벌어먹으라고 했다. 일하기 싫어하면 먹지도 말라고 했다.

변호사를 하면서 만난 지금도 기억에 남는 남자가 있다. 그는 시골에서 곡괭이 한 자루를 가지고 서울로 올라왔다고 했다. 그는 임금에 상관없이 매일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일거리가 없는 날은 남의 일터로 가서 공짜로 일을 해 주었다. 한겨울 땅이 꽁꽁 얼어붙었을 때도 그는 공사장을 찾아가 돈을 받지 않고 언 땅에 곡괭이질을 하고 삽으로 흙을 팠다. 노동이 우상이고 일에 미친 것 같아보였다. 상대적으로 일의 중요성을 깨달은 적이 있었다.

미국에서 출발해서 태평양을 건너는 크루즈 선을 탄 적이 있다. 그 배는 승객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먹고 마시고 춤추고 즐기기만 하면 되는 바다 위의 천국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했다.

승객 중에 동양인은 나를 포함해서 서너명 정도인 것 같았다. 내가 중학시절 교과서에 그 배의 이름이 나왔었다. 언젠가는 그 배를 타보고 싶다는 소원이 있었다.

‘사랑의 유람선’이라는 외국 드라마를 본 적이 있었다. 그런 배는 환상 그 자체인 것 같았다. 무리를 해서 그 배에 올랐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매너리즘에 빠져 있기도 했다. 일을 한다는 자체가 지겹기도 했다.

그 배 속에서의 처음 일주일은 화려한 천국을 구경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무대에서 최고의 쑈와 마술이 펼쳐지고 있었다. 식당에는 기름진 음식들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다.

은촛대에 불이 켜지고 투명한 와인글래스가 놓인 테이블 옆에서 웨이터들이 식사 시중을 했다. 작은 천국이 검푸른 태평양을 미끄러지면서 하와이와 타이티 섬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이주일쯤 흘렀을 때였다. 북적거리던 파티장도 레스트랑도 풀장도 다 썰렁한 느낌이 들었다. 승객들의 표정에 무료함과 권태가 가득 찬 것 같았다. 그들에게 그 배는 더 이상 천국이 아니었다.

한 영국인 중년여성이 나를 보고 셰익스피어를 공부하고 싶지 않느냐고 했다. 자기는 고등학교 영어 선생으로 일생을 보냈다고 했다. 그러면서 배 안이지만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화가 출신 같아 보이는 여성은 놀이에 참가하지 않고 갑판의 구석에서 계속 스케치 북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정장을 입은 영국인 노인은 배안 어둠컴컴한 작업실의 한쪽에서 둥근 테두리의 나무 틀에 천을 끼워놓고 굵은 바늘로 십자수를 놓고 있기도 했다.

인간은 단순한 놀이보다는 그날그날 어떤 성취감을 바라는 것 같았다. 배 안에서 보던 책 속의 주인공 희랍인 죠르바는 내게 인생은 허리띠를 쥐고 말썽을 찾아 나서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일하다가 발생하는 말썽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무료한 천국속에서 나는 갑자기 일이 가득한 지옥에 돌아가고 싶었다. 나는 그 배가 잠시 정박한 뉴질랜드에서 내려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와 다음 날부터 즐겁게 일을 했다.

삶의 소재인 일 자체가 감사고 축복인 걸 알았다. 평생 노동의 관념을 모르는 사람을 봤다. 일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을 봤다. 그런 사람들이 제일 불행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 봤다. 

글 | 엄상익 변호사

경기중-고, 고려대 법대를 나오고 제24회 사법시험(1982)에 합격했다. 6공 때, 국정원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 특별보좌관실에 근무하며 권부의 이면을 보았다. 변호사를 하면서 ‘대도 조세형’, ‘탈주범 신창원’ 등 사회 이목을 끌은 대형사건 피의자들을 변호했다. 글쓰기를 좋아해 월간조선을 비롯, 조선-중앙-동아일보 등에 칼럼을 연재했고 수필집, 장편 소설 등 1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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