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데 개인과 개인 사이의 관계뿐 아니라 개인과 집단과의 관계가 문제될 수 있다. 개인은 직장, 단체, 사회 또는 국가와 같은 조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개인과 집단과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개인의 성격이나 가치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심리학자는 개인에 초점을 맞추고, 사회학자는 사회적 관점에서 개인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집단을 단순히 개인적 특성의 합으로 보는 관점이 있고, 집단은 개개인으로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한 특성과 기능이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조직을 우선시하는 사람도 있고, 조직보다 개인을 중시하는 사람도 있다. 

문제는 개인과 집단 간에 적절한 조화가 필요하나, 현실은 개인과 집단의 성격에 따라 그것이 쉽지 않다는데 있다. 

개인은 집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다수를 따르는 경향이 있다. 다수 의견이 자신의 견해인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다수가 더 옳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소수보다는 다수에 속하는 게 안전하며 지배 세력의 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소신껏 행동한다고 믿고 있으나, 사실 남의 생각을 따르는 어리석은 대중의 한사람일 뿐이다.

집단 의견을 따르는 대중 100명의 의견이 현명한 개인 한 사람의 비판적 의견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볼 일 이다. 

아무 생각 없이 집단에 매몰될 때 개인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도구적 존재로 전락하면서 자기실현 또는 개성화와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더 이상 스스로 진정한 자신의 원칙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집단에 무조건 동조하기보다는 개개인이 올바른 판단을 하고 개인의 고유한 가능성을 살릴 수 있을 때, 자기실현뿐만 아니라 사회 발전도 이룰 수 있다.

개별 의견을 가진 현명한 사람 100명이 집단에 동화되어 어리석은 한 사람이 되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융은 집단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는 내면의 소리(영혼의 소리, 다이몬, 소명)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하며, 그것이 인격자가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이라고 말한다.

집단이 사회 정의와 같은 거창한 ‘선’을 표방하고 개인의 순응을 요구할 때 ‘선’을 가장한 전체주의적 발상은 아닌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전체주의의 문제는 전체를 위해 개인의 개별적 특성이 존중되지 않는다는데 있다. 모두가 잘 살기 위한 것이라는 전체주의의 구호와 달리 개인의 행복은 보장되기 어렵다. 

삶의 의미를 찾고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 체험이다. 진정한 ‘선’인지 아닌지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궁극적으로 누구를 위한 것인지,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데서 벗어나 있는지 그리고 그 방법이 적절한지 등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공공복지나 평생 안전 보장, 국가들 사이의 평화 같은, 악마를 일컫는 멋진 이름들 아래에 악마가 숨어 있다고 누가 의심하겠는가? 악마는 이상주의 아래에 숨고, 일반적으로 ‘이즘’ 아래에 숨는다.” 

제2차 세계 대전, 나치즘, 파시즘, 러시아 혁명 그리고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냉전시대를 겪은 융의 《아이온》이란 책에서 나온 말이다. 

사람들은 ‘악은 단순한 해결책을 내건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융은 인간을 보편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객관적 정신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개별 존재를 통하지 않으면 표현될 길이 없다고 주장하며, 그 정신이 개인의 의식에 동화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면서 집단을 사로잡을 경우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계속>

글 | 김창윤 교수

울산대 의과 대학, 서울아산병원 정신 건강 의학과 교수. 조현병, 조울증, 강박 장애 클리닉을 운영하고 있으며 개인 및 가족 문제를 상담하고 있다. 서울대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코넬대 분자신경생물학 연구소에서 연수했으며 서울아산병원 정신 건강 의학과 과장을 역임했다. 약물 치료뿐만 아니라 심리 치료에도 관심이 많고 칼 구스타프 융과 동서양 철학에 이론적 기반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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