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적응은 성격 유형에 따라서도 차이를 보일 수 있다. 현실에 적응하는 데는 내향형이 외향형보다 불리하다. 외부 세계에 대한 적응은 내향적 기능보다 외향적 기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내향적 성격은 내면적 우월감을 은근히 내보이고 싶지만 외향적 기능이 열등하여 정작 외부 현실 세계에서는 상처를 받고 열등감을 느끼기 쉽다.

외향적인 사람은 쉽게 외부 환경에 적응할 수 있지만 내향적인 사람은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적응하는데 좀 더 힘이 들 수 있다는 얘기다. 

 

내향적인 사람은 외부 환경 적응에 어려움을 겪게 되면 내면세계로 도피해서 권력(우월감) 환상에 빠질 수 있다. 이럴 때는 외향적 기능을 의식적으로 최대한 살리는게 적절한 해결책이다.

처음에는 외향적인 사람보다 적응이 느리고 힘이 들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름 훌륭하게 적응할 수 있다.

거기에 훗날 내향적 성향 특유의 깊이까지 더해지면 현실 적응에 창의성을 발휘하기도 한다. 

 

20대 초반의 내향적인 P는 대학 진학에 연이어 실패하고 실의에 빠졌다. 한동안 만나던 여자 친구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멀어졌다.

아버지처럼 초라하게 살고 싶지는 않았는데 열심히 해 봐야 아버지만도 못할 거 같다. 

아무 대학에나 들어가든지 아니면 집에서 노느니 아르바이트라도 알아보라는 어머니의 성화에 자존심 상하고 화가 난다. 자신의 존재 가치에 회의적인 생각이 든다. 인간은 왜,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종일 컴퓨터 게임만 하다 어머니 성화에 상담차 내원했다. 삶의 의미에 대한 실존적 고민을 현실 적응 문제로 환원해서 보는 시각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순조롭게 적응하는 경우에도 성(性)과 관련된 문제나 열등감 등과 같은 내적 고민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삶에 대한 회의는 대부분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삶이 순탄할 때는 인생의 의미에 관해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다가 시련에 부딪혀 비로소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삶에서 현실 적응을 잘 못하면서 실존적 고민을 호소하는 경우는 대개 청소년기에 많이 나타난다. 이때에는 철학적 고민을 깊이 다루기보다는 현실 적응을 도와주는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 바람직한 치료 방향이다. 

 

P는 치료 초반에는 현실 적응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치료 후반부에는 삶의 근원적 고민과 관련한 철학적 상담을 병행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

P는 바로 다음 해에 원하던 대학을 진학했다. 새로운 여자 친구도 사귀고 부모와의 갈등도 그리 신경 쓰지 않아 언제 실존적 고민을 했냐는 듯이 밝아졌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도 사회성이 부족한 내향적 청소년의 페르소나 문제를 잘 보여 준다.

“부끄러움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라고 말하는 부잣집 아들 요조는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 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민한다.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세상에 뛰어들지도 못하면서 술, 담배, 여자 사이에서 겉돌고 방황하다 자살을 시도한다.

정신적 방황과 부끄러움은 존재 조건에 대한 이해에 앞서 나이와 상황에 걸맞은 페르소나를 갖추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인간 실격’은 사실 ‘페르소나 실격’인 셈이다. <계속>

글 | 김창윤 교수

울산대 의과 대학, 서울아산병원 정신 건강 의학과 교수. 조현병, 조울증, 강박 장애 클리닉을 운영하고 있으며 개인 및 가족 문제를 상담하고 있다. 서울대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코넬대 분자신경생물학 연구소에서 연수했으며 서울아산병원 정신 건강 의학과 과장을 역임했다. 약물 치료뿐만 아니라 심리 치료에도 관심이 많고 칼 구스타프 융과 동서양 철학에 이론적 기반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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