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이다. 나의 법률사무소로 파란 눈의 백인 여자가 찾아 왔었다. 루마니아 출신이라고 했다. 더듬거리지만 한국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루마니아 시골에서 포도 농사를 하는 부모 밑에서 살았어요. 열 여덟살 때 한국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러 온 남자를 알게 됐어요. 처음에는 한국 사람이 어떻게 생겼나 궁금해서 어울렸다가 사랑을 하고 결혼까지 하게 됐어요. 저보다 스물 여섯살 많은 남자였어요.

그 사람이 우리 농장에 와서 이년 동안 같이 살다가 귀국하게 됐어요. 그 사람이 같이 가자고 해서 한국으로 왔어요. 한국으로 와서 보니까 그 남자한테 전 부인이 있고 그 사이에서 난 아들도 있었어요. 제가 한국에 와서 딸을 둘 낳았어요.”

요즈음은 베트남부터 시작해서 외국인과 결혼하는 수가 많았다. 문화와 생각이 다른데서 여러 가정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 그녀가 말을 계속했다.

“아이 세 명을 길렀어요. 남편의 전 와이프 아들 도시락 싸주고 내 딸 우유도 먹여야 하는데 남편이 돈을 주지 않아요. 더러 이삼일에 한 번씩 만원을 주는 데 너무 부족해요.

그래서 공장에 나갔어요. 전자부품을 만드는 공장인데 나사도 돌리고 납땜도 했어요. 한 달에 오십만원을 받아서 남편한테 가져다 줬어요. 그런데도 애들 우유 사 먹일 돈을 주지 않아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가슴이 애잔해졌다. 변호사란 그런 안타까운 호소를 묵묵히 들어주어야 하는 직업이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조용히 기다렸다.

“남편은 친구들 하고 만나는 데 저를 한 번도 데리고 가지 않았어요. 같이 밖에 나가서 식사를 한 적이 없어요. 모임에도 저를 데리고 가지 않았어요. 그리고 자꾸만 때려요. 머리를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그래요. 맞아서 얼굴이 새까매진 적이 많아요. 눈 밑도 새까매지고요.”

그녀의 눈 아래 멍 자국이 거뭇하게 남아있었다. 그녀는 남편에게서 쫓겨나서 한국에서 우연히 알게 된 외국 여성의 방에서 임시로 묵고 있다고 했다. 내 마음속에서 은은한 분노가 일고 있었다. 그녀도 그 부모의 귀여운 딸이었다.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데려와서는 학대하는 것이다. 이 사회에는 자기 보다 못해 보이는 외국인에게 그런 짓을 하는 못난이들이 종종 있었다.

“이혼을 하고 위자료를 받아 고향인 루마니아로 돌아가지 그래요?”

내가 말했다.

“안돼요. 루마니아로 돌아가면 우리 아이들 못 봐요. 남편이 아이들을 빼앗고 저를 쫓아냈어요. 한국남자 참 이상해요. 욕하고 때리고 미워하면 이혼하면 될 텐데 위자료 받아낼까 봐 이혼은 안된대요. 그거 필요 없다고 그랬는데도요.”

세상은 요지경이다. 우리나라 여자가 외국으로 시집을 가서 학대를 받기도 했다. 나의 법률사무소로 온 한 여성으로부터 이런 사연을 들었었다. 잘생긴 백인 남자에게 반해 미국 중부의 농가로 시집을 간 여성의 케이스였다.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가서 살던 미국의 그 작은 마을 사람들은 맨날 위스키에 취해 살고 있는 것 같았어요. 사람들이 마을의 바에 모여 술만 마셔요. 남편도 일하지 않고 취해서 사는 날이 많았어요. 백인 사이에 혼자 있게 된 저를 애정으로 대해주는 사람들은 없었어요. 시부모가 나하고 말도 한마디 안 했어요.

어느 날부터 남편이 나를 때렸어요. 어떻게나 힘이 센지 나를 들어서 던지면 내가 날아가 반대편 벽에 부딪쳐 바닥에 패대기쳐졌어요. 맞아 죽을 것 같아 경찰에 신고한 적이 있어요. 잠시 후 경찰차가 왔는데 경찰관도 마을 사람들과 다 친척이나 친구로 연결되니까 남편 몇마디를 듣고 그냥 가 버리더라구요. 호소할 데가 아무 데도 없었어요. 나는 미국 마을의 개만도 못하더라구요. 그래서 아이를 데리고 한국으로 도망을 왔어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울컥했었다. 내가 상상한 목가적인 미국의 시골 농가의 모습이 아니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따뜻한 가정을 연상했었는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성경을 보면 이방인을 잘 대해 주라고 했다. 너희도 이집트에서 이방인이었지 않느냐고 하고 있다. 추수할 때 땅에 떨어진 이삭들을 그냥 놔두라고 했다. 그리고 포도를 딸 때도 남겨두라고 했다. 가난한 사람들과 이방인들을 위한 몫으로 하라는 것이다.

외국인을 천대하면 우리도 천대를 받는다. 그게 세상의 이치다. 한 사람의 개인이 그 사회의 수준이고 국가의 품격이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나라가 품격있는 나라 아닐까.

글 | 엄상익 변호사

경기중-고, 고려대 법대를 나오고 제24회 사법시험(1982)에 합격했다. 6공 때, 국정원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 특별보좌관실에 근무하며 권부의 이면을 보았다. 변호사를 하면서 ‘대도 조세형’, ‘탈주범 신창원’ 등 사회 이목을 끌은 대형사건 피의자들을 변호했다. 글쓰기를 좋아해 월간조선을 비롯, 조선-중앙-동아일보 등에 칼럼을 연재했고 수필집, 장편 소설 등 1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

저작권자 © 마음건강 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