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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맘의 토요 스토리 (14)

시골 할아버지 집에 가는 길

"바람이 마중 나왔나 봐요"


번아웃 증후군을 겪던 어느 날, ‘나의 글’을 써야겠다 마음먹었다. 글 쓰는 즐거움, 글이 가진 힘, ‘우리 딸 최고’ 아빠의 칭찬에 홀린 듯 글 쓰는 걸 직업으로 삼았다. 여느 직장인이 그렇듯, 일로 삼은 글쓰기는 생각보다 즐겁지만은 않았다. 말 그대로 ‘일’이었으니까. 사람에 상처받고,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쌓여만 가니, 점점 흥미가 떨어졌다. 그래서 작은 노트를 마련했다. 작은 가방에도 쏙 들어가는 손바닥만 한 크기에 가벼운 것으로. 뭐든 떠오를 때마다 기록해두자, 생각했다. 

단편적인 메모에 불과했다. 단어 몇 개, 문장 몇 줄, 그게 전부였다. 그래도 어딘가에 끼적인다는 데 의의를 뒀다. 그때그때 남겨뒀다가 때가 되면 완전한 글로 다듬을 생각이었다. 여러 날 모으고 모은 기억을 펼쳐보다가 아이의 말 기록에 시선이 가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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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유난히 따른다. 친가, 외가를 가리지 않는다. 할아버지 집에 간다고 하면 며칠 전부터 손꼽아 기다린다. 하지만 가는 길은 무척 힘들어한다. 최소 세 시간을 차 안에서 참아야 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동화도 듣다가, 간식도 먹다가, 엄마 손도 잡았다가…. 아무리 기다려도 도착할 기미가 안 보이자, 아빠를 재촉하기 시작한다. 

“언제 도착해요? 이제 다 왔어요? 얼마나 더 기다려요?"

 

어른도 한 자리에 오래 앉아있으면 엉덩이가 배기는데, 고작 다섯 살 어린이는 오죽할까.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달리는 자동차 안에선 그 이상 해줄 게 없다. 산을 가로질러 난 도로를 달리고 있을 때, 남편은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산바람이 얼굴에 부딪혔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은 공들인 머리 스타일을 순식간에 흩트려 놓았다. 서둘러 머리카락을 눌러 잡고 있는데, 아이가 말한다. 

“아빠, 할아버지 집에 사는 바람 같아요! 할아버지가 우리 조심히 오라고 바람한테 마중 가라고 했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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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정신이 번쩍 뜨이게 했다. 예고 없이 창문을 열었다고, 남편을 타박하려던 게 민망해졌다. 머리카락이 휘날리든지 말든지, 서둘러 아이의 말을 휴대전화 메모장에 담아뒀다. 

호기심에 던진 질문에도 예상 밖의 대답을 했다. 배 속에 있을 때 느낌을 묻자, 마치 어제 일처럼 설명했다. 눈이 부시고 좁아서 발로 뻥뻥 찼다면서.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때 너무 아팠다고 엄살을 부렸다. (사실, 엄청 아팠다) 그랬더니, 아이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미안했다"고 사과했다. 진심으로 미안한 모양이었다. ‘왜 장난을 쳐서 애를 울렸나’ 후회했다. 

아이의 언어는 참 아름다웠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 불쑥 튀어 나와서 설레게 했다. ‘한때는 나도 아이의 눈을 가졌었는데….’ 이제는 미치지 못하는 영역인 것 같아 아쉽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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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아이가 있어서, 아이의 눈으로, 아이의 언어로 다시 세상을 돌아볼 수 있음에 감사하다. 알고 있던 단어와 표현도 아이의 눈을 거치면 세상 무엇보다 아름다워 보이는구나,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언어로 다시 태어나는구나, 또 한 번 배운다. ‘나의 글’을 쓰고 싶은 엄마에게 쉴새 없이 글감을 던져주는 아이가 고맙기만 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언어가 또 있을까? 이렇게 아름다운 언어를 어떻게 담아내지 않을 수 있을까?

글ㅣ 김명교
12년 차 교육 기자다. 집에선 다섯 살 달콩이의 엄마다. 교육 현장에서 만난 수많은 취재원의 이야기를 귀동냥 삼아 ‘잘 키워보자’ 했지만, 워킹맘의 현실 육아는 버거움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번아웃과 우울증 사이에서 무너졌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brunch.co.kr/@dam-un) 일과 육아에 가려있던 ‘나’를 일으키고 마음근육을 키우는 중이다. 글을 쓸 때 마음이 벅차오른다. 글 속에 찰나를 담아내고 싶어 오늘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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