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닷컴

목요 연재 | 송종찬의 시베리아 유랑기 (20)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

도스토에프스키 생가를 찾아서

송종찬 시인  2020-10-22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러시아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과학아카데미 22층 베란다에서 조촐한 환송회를 가졌다. 여직원 올라가 퇴사하는 날이었다. 사람을 떠나보낼 때마다 이별의 장소로 높은 곳을 선택했다. 떠나는 이에게 원경(遠景)을 보여줌으로써 훨훨 비상하는 소망을 심어주고 싶었다. 


이별의 시간인지라 서먹서먹했다. 서로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주저했다. 처음부터 덕담을 꺼낼 수 없어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중 누구를 더 좋아하는지 질문을 던져보았다. 예상대로 참석자들은 뜨겁게 반응했다. 토론의 열기가 달아오르며 서먹한 분위기가 다소나마 누그러졌다. 이 질문은 엄마, 아빠 중 누구를 더 좋아하는지를 묻는 것과 다름없었다.


러시아는 장편의 나라다. 긴 겨울과 대륙의 빈 공간을 시로 채우기에는 애당초 불가능하다. 러시아의 많은 시인이 절명한 이유는 광활한 시간과 공간을 시로 다 채울 수 없어 좌절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러시아에서 이긴다는 의미는 견딘다는 것이며,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공항이나 경기장에서 미동도 없이 긴 줄에 서서 기다리는 사람을 보면서 인내의 DNA가 남다름을 느꼈다.


학창시절 겨울방학이 시작될 때마다 러시아 장편소설을 읽을 계획을 세웠지만 한번도 제대로 완독하지 못했다. 사람의 이름들이 헛갈리기 시작하는 지점부터 진도가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소설책은 책의 기능을 상실하고 이내 라면냄비 받침대로 쓰이곤 했다. 러시아의 19세기 소설은 왜 그토록 길고 복잡했을까.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은 넘지 못할 거대한 산맥이었다.

 

161 (1).jpg
도스토옙스키 초상화(바실리 페로프 作)


도스토예프스키 생가를 찾아가던 날 이슬비가 내렸다.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지하철 도스토엡스카야역에서 내려 그의 이름을 딴 거리를 따라가면 나오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의 도스토예프스키 울리짜 2번지는 그가 태어나 16년 동안 살았던 곳이다. 아버지는 자선병원 의사로, 도스토예프스키는 병원에 딸린 작은 숙소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거리와 역은 찾기 쉬웠는데 생가를 쉽게 찾지 못해 동네 사람에게 물어봐야 했다. 러시아인은 작가의 생가를 원형 그대로 보존하지 특별하게 치장하지 않는다. 그들이 살던 집 그대로가 박물관이 된다. 도스토예프스키박물관만 해도 그가 태어난 모스크바, 수용소생활을 한 옴스크, 죽음을 맞이한 상트 페테르부르크 등 다섯 군데가 넘는다. 이처럼 작가를 대접하는 나라도 드물다.

 

162 (1).jpg
도스토옙스키 생가

 

쥐가 돌아다닐 것 같은 입구, 삐걱거리는 문, 창틀에 내려 쌓인 먼지 등 생가에 들어서자 우울한 분위기가 밀려왔다. 버려진 아이들과 가난한 이들이 찾던 자선병원은 생과 사를 가르던 경계였다. 가장 밝아야 할 유년시절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쪽방의 작은 창문 사이로 회색빛 장면을 보며 자랐다. 그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생가에서 본 것은 유품이 아니라 우울한 과거와 누렇게 변한 침묵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생의 마지막을 보낸 공간도 궁금했다. 시간을 내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갔다. 모스크바에서 상트는 780km 떨어져 있는데, 러시아 기준으로는 먼 거리가 아니다. 아침에 특급열차 삽산을 타고 가서 저녁에 돌아올 수 있는 거리이다. 

 

163(1).jpg
도스토옙스키가 죄와벌을 집필한 집

 

우연인지 도스토예프스키가 죽은 장소를 찾아가는 날에도 진눈깨비가 휘날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죽어서까지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11월 쿠즈넵스키 거리는 을씨년스러웠다. 죄와 벌을 썼던 집도 카라마조프를 쓰고 임종한 곳도 모퉁이집이었다. 


유럽을 본 따 세운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귀족에게는 환상의 공간이었지만, 가난한 작가에게는 불편한 도시였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살던 곳은 사창가와 선술집들이 즐비했던 센나야광장 근처였다. 그리보에도프 운하의 흙탕물이 진눈깨비를 연신 받아내고 있었다.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는 1820년대에 태어나 짜르의 전제정치를 온몸으로 느끼며 동시대를 살았다. 하지만 삶의 행로는 완전히 달랐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불우한 학창시절, 시베리아로의 유형, 간질과 질병 등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한 반면, 톨스토이는 백작의 아들로 태어나 귀족생활, 방탕과 참회 그리고 종교에 귀의까지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모스크바 톨스토이울리짜 21번지는 톨스토이가 18년을 살았던 공간이다. 시내 한복판에 있는 톨스토이 박물관은 정원이 딸린 이층집이었다. 집사와 시녀들의 방이 2층에 있고, 1층에는 서재와 거실, 그리고 딸들의 방들이 보존되어 있었다. 가죽 소파와 값비싼 도자기, 정교하게 세공된 가구들이 톨스토이의 풍족한 삶을 보여주고 있었다. 

 

20200430502795.jpg
레프 톨스토이

 

톨스토이의 화려한 문체와 거칠 것 없는 사랑을 주제로 한 소설들이 떠올랐다. 톨스토이는 50대에 접어들면서 화려한 도시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인 야스나야 뽈라냐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참회록을 쓰면서 농노들과 함께 말년을 보냈다. 자발적으로 선택한 가난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다. 하지만 그의 삶은 아름답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 절망 속 어딘가에 숨어 있을 작은 아름다움을 끝없이 찾아 나섰을 뿐이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간절한 믿음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견디어 나갔다. 


반면 톨스토이는 ‘사랑만이 인류를 구원한다’고 했다. 톨스토이는 사랑을 알지 못했다. 두 살 때 어머니, 아홉 살에 아버지를 여의어 사랑에 목이 말랐다. 결혼생활도 갈등의 연속이었다. 


그는 뒤늦게 세속적 쾌락과 물질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참회록을 쓰면서 큰 사랑을 실천해 나갔다.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가 찾아낸 ‘아름다움’과 ‘사랑’이란 두 단어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일 것이다.


러시아인은 과연 누구를 더 사랑하겠는가? 사람을 만날 때마다 물어보았는데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이 러시아적이라면 톨스토이의 문학은 세계적이다. 그런 영향인지 국립도서관 앞에는 고뇌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동상이 서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비교는 애당초 불가능하다. 톨스토이가 해였다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달이었다. 톨스토이가 삶으로부터 죽음을 생각했다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죽음으로부터 부활을 생각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자기구원에 충실했다면 톨스토이는 민중의 구원에 다가갔다. 둘은 서로 달랐지만 해와 달처럼 동시에 존재했기에 러시아 문학은 더 빛났고 위대했다.

 

 

 

시월


그냥 떠나보내기 아쉬워

지는 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강 건너 말집이 어둠에 잠길 때까지


그대 떠나는 가을길

밥이라도 먹여서 보냈어야 했는데

찬 바람 소리에 머리칼이 얼굴을 스치는 듯


창문을 꼭 닫아걸고

별 아래 가물거리는 지평선을 바라보다

입술을 깨물고 참아내는 속울음


글ㅣ 송종찬
고려대학교에서 러시아문학을, 대학원에서 언론홍보를 전공했다. 1993년 <시문학>에 ‘내가 사랑한 겨울나무’외 9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펴낸 책으로 시집 ‘그리운 막차’ ‘손끝으로 달을 만지다’ ‘첫눈은 혁명처럼’ , 산문집으로 '시베리아를 건너는 밤' 이 있다. 2011년부터 4년여 동안 러시아 체류하며 외국문학도서관 부설 루도미노출판사에서 러시아어시집 ‘시베리아를 건너는 밤(Транссибирские Ночи) 을 출간했고, 루스키미르재단의 초청작가로 활동했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무단 전재 및 배포 금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