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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준의 마음 디톡스 (38)

힘든 '어린 시절'이 중장년 돌연사의 원흉

트라우마가 신체건강에 미치는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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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철(45)씨는 토요일 아침 6시 눈을 떴다. 평소처럼 화장실에 가기 위해 일어나려고 했는데 몸을 꼼짝할 수 없었다. 풍선의 바람이 빠지듯 팔 다리가 축 늘어져 전혀 움직일 수 없었고, 심지어 손가락 발가락조차 까딱할 수 없었다. 

그는 옆에서 자는 아내를 깨웠다. 그런데 아내는 일어날 줄 모른다. 다시 그는 큰 소리로 아내를 불렀다. 

그제야 눈을 뜬 아내는 남편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입에서 침이 질질 흘러나오고 있었다. 평소 얼굴이 아니라 안면마비가 된 모습이었다.  축 늘어진 얼굴, 더구나 온 몸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이 말하는 소리는 웅얼웅얼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그의 입술이 움직이고 입에서는 단어들이 나오지만 그녀는 그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세상에!  혹시 뇌졸중 아니야?’

아내는 바로 전화기를 들어 119 긴급전화를 불렀다. 10분도 되지 않아 응급 의료진으로 구성된 요원들이 도착했고 그는 앰블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갔다. 

아내는 응급실 당직 의사에게 남편에 대한 정보를 알려준다. 

“평소 운동 좋아하구요. 건강검진 때도 아무 이상 없었어요. 담배도 전혀 안피고. 최근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었고 모든 게 정상이고 행복한 생활이었어요."

그러나 그런 형철씨에게 갑자기 뇌졸중이 찾아왔고 이후 병원에서 수개월 입원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그 후유증으로 평생 반신불수로 지내는 몸이 되고 말았다. 

도대체 왜 건강한 형철씨에게 갑자기 뇌졸중이 찾아왔을까. 

왜 건강진단에는 전조를 알리는 어떤 신호도 나타나지 않았을까

이처럼 병원에는 평소 건강한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뇌졸중, 심장발작, 혈액암, 그 밖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으로 쓰러져 찾아오는 사례가 적지 않다. 예전에는 의료진들이 그 원인을 잘 몰랐으나 최근에는 유력한 원인 하나가 연구로 입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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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바로 ‘어렸을 적 겪은 부정적 경험(트라우마)’이다. 부모의 잦은 다툼, 부모로부터 받은 폭력, 또는 제3자로부터 당하는 성폭력, 극심한 나쁜 환경 등등 환자가 어렸을 적 겪은 나쁜 경험이 이후 그의 심혈관계, 면역계, 내분비계에서 보이지 않는 생물학적 과정이 진행돼 그것이 어느날 형철씨처럼 뇌졸중이나 아니면 다른 중증 질환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아동기에 경험한 트라우마가 정서적이나 성격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많이 알고 있다. 그러나 어린 시절 겪은 일이 뇌졸중이나 심장병, 암 등 신체적 질병과 관련이 있다고 의심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소아과의사이자 지역의료사회 수장(首長)인 네이딘 버크 해리스(Nadine Burke Harris)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평생 건강 미치는 영향’을 임상의학, 뇌과학, 면역학을 기반으로 밝혀내 세계적 관심을 받고 있다. 아동기에 겪은 극심한 스트레스가 성인기에 나타나는 심장병, 암, 자기면역질환과 같은 치명적 질변의 위험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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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지난 15년간 샌프란시스코의 대표적 우범지역인 베이뷰 헌터스 포인트 주민들의 진료경험을 토대로 이같은 결과를 입증해냈다. 그녀는 이 지역 아이들중 상당수가 신체 발달이 늦고, 신체적-정신적 갖가지 질환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고 추적 조사 결과 아이들이 학대와 방임, 폭력, 공포의 형태로 트라우마와 스트레스에 직면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들의 부모들은 대개 술이나 마약에 취해 있거나 감옥에 가거나 이혼했다.

 

그녀는 아동기의 불행은 말 그대로 몸에 새겨져 그 사람을 변화시키며 몸 속에 일어난 그 변화는 수십년 동안 사라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평생 안고 가야 할 만성 염증과 호르몬 변화, 또는 DNA를 읽는 방식, 세포 복제 방식을 바꿔놓을 수도 있으며, 심장병과 뇌졸중, 암, 당뇨병, 알츠하이머에 걸릴 위험까지 급격히 증가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가혹한 환경 하에서 자랐지만 이를 경이적으로 극복해 자수성가한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그들조차도 성인이 돼 행복한 삶을 꾸려나가도 결국 자신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로 생물학적 문제에 발목 잡혀 있다는 것을 늦게 깨닫게 된다. 

아까 형철씨의 예처럼 어느 날 갑자기 병에 걸린다. 뇌졸중으로 쓰러지거나 폐암에 걸리거나 심장병이 생기거나 우울증에 빠진다. 병원에서 그런 건강 문제를 ‘지금’에서 찾고 있지만 진짜 원인은 ‘먼 지난 과거’에 있었다.  

어린 시절 스트레스에 노출된 경험은 이후 잠복해 있다가 중년기나 은퇴기의 건강문제로 이어지는 것이다. 형철씨의 경우는 5살 때 부모가 이혼했으며 그는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가혹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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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딘 버크 해리스는 2005년 스탠퍼드대 소아과 레지던트 과정을 마친 뒤 샌프란시스코 저소득층 유색인 동네인 베이뷰 헌터스 포인트 마을에 소아과 진료소를 연뒤 이런 문제들에 하나하나 접근해 결국 해답을 찾아냈다. 

이후 그녀는 지난 20년간 의학계에서 이뤄진 부정적 아동기 경험 연구(Adverse Childhood Experiences study: ACE 연구)을 토대로 학대, 방임, 폭력, 부모의 이혼, 빈곤 등을 겪은 아이들의 고강도 스트레스를 효과적으로 치료하는 방법을 만들었다. 이른바 ACE검사를 기초로 잠재적 환자들을 가려내고 그들의 트라우마를 해소시키는 식의 치유법이며, 이는 성인들에게도 유의미한 방법이다. 자신의 어린 시절 잊고 싶은 ‘과거’로 인한 병의 발생을 사전에 인지하고 해결해나가려고 노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 덕분에 그녀는 2019년 캘리포니아주 공중보건국장으로 임명돼 저소득층 주민들의 건강을 돌보고 있고 TED 강연을 비롯 저서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은 최근  국내에서 출간되기도 했다.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 (네이딘 버크 해리스, 심심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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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부정적 경험은 정신 건강뿐 아니라 신체 건강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치유되지 않은 아동기의 불행은 성인이 된 후 자녀에게까지 대물림될 수 있다. 

소아과의사인 저자는 심리 분야의 ‘트라우마’ ‘스트레스’를 의학과 연결해 아동기에 겪은 유독성 스트레스가 성인기에 심장병, 암, 자가면역질환 등 질병의 위험 요소가 될 수 있음을 설명한다. 또한 아동기에 겪은 학대, 방임, 폭력, 부모의 이혼, 빈곤 등의 부정적 경험이 빈곤지역 및 특정 인종, 특정 직업군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광범위하게 일어날 수 있는 ‘우리들’의 일임을 강조한다. 

 

글ㅣ 함영준
22년간 신문 기자로 일했다. 스스로 신문사를 그만둔 뒤 글을 썼고 이후 청와대 비서관 등 공직 생활도 지냈다. 평소 인간의 본성, 마음, 심리학, 뇌과학, 명상 등에 관심이 많았으며 마음건강 종합 온라인매체인 마음건강 ‘길’(mindgil.com)을 2019년 창간해 대표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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