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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인의 놀멍쉬멍

위스키 마시며 서두름보다 기다림 생각하다

글렌피딕 시음회에서 벌어진 일들

김혜인 기자  2020-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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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면 첩보원들이 위스키를 즐기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007 제임스 본드의 술'로 알려진 맥캘란 위스키와 ‘킹스맨’에서 선보인 달모어와 글렌드로낙이 있다. 영화처럼얼음과 함께 온더락으로 즐기기도 하고, 가볍게 탄산수와 섞어 하이볼로 마신다. 

위스키에 대해 보고 들은 것은 많았지만 즐길 기회는 많지 않았다. 대학 때는 가난한 대학생이라 소주를 마셨고, 졸업 후에는 맥주나 저렴한 와인을 마셨다. 일본 여행을 갈 때 하이볼로 마신 게 전부였다. 내가 생각하는 위스키는 쓰고, 도수가 높고, 비싸다. 이 세 가지 기억이 컸다.

지난 18일에 글렌피딕에서 주최하는 ‘글렌피딕 몰트 앤 저니’에 다녀왔다. 참가비는 무료며 sns에서 랜덤 추첨을 통해 참가 기회가 주어진다. 인스타그램에서 100명이 넘는 지원자 중에 당당히 뽑혀 행사에 다녀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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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18명이 참가한 이번 행사는 랜덤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선정자가 발표된 후 같이 당첨된 사람들의 sns를 구경해보니 타임라인에 술과 관련된 사진들이 많았다. 위스키에 조예가 깊은 사람도 있었고, 자가 양조를 하는 사람, 와인을 하는 사람 등 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준 것 같았다. 

멤버 중에는 다른 행사를 여러 번 참여해서 앰버서더(글렌피딕 홍보대사)와 친분이 있는 사람도 있었다. 동행 역시 커플, 친구, 부부 등 다양했다. 나도 와인 페어를 가끔 갔지만 이렇게 긴 테이블 바에 앉아서 20대부터 40대까지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이 모여서 시음을 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각자 원하는 와인을 시음하며 스탠딩 형식으로 진행됐는데, 이곳은 착석해서 서로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이 신선했다. 

행사가 시작되자 글렌피딕 공식 앰버서더가 나와 우리에게 글렌피딕 위스키에 대한 역사와 유래 등 다양한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글렌피딕은 1886년 스코틀랜드에서 창업주가 아들 딸과 함께 시작했다고 한다. 그 역사가 지금까지 이어져서 전 세계적인 위스키로 발돋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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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WICA 판다곰 /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memberNo=3880966&volumeNo=27748799

 아무래도 가족들과 함께 경영을 하다 보니, 자신들이 지금 만드는 술이 훗날 아들 딸, 손자 손녀의 자산으로 이어져서 좋은 재료와 환경을 고수하게 됐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수익을 내기 보다는 미래를 바라보고 하는 비즈니스인 것이다. 현재 스코틀랜드에서 있는 100여개가 넘는 양조장 중에 대기업이 아닌 개인이 소유한 양조장은 글렌피딕을 포함, 4개만 남았다고 한다. 모두 대기업이 관리하고 있다고. 

이는 섬세한 과정도 한 몫 했다고 볼 수 있다. 위스키는 기다림의 미학이 돋보이는 술이다. 증류를 끝내고 나서 짧게는 10년 길게는 100년이 넘는 오크통 숙성 과정이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숙성할 오크통을 튼튼하게 만들어 줄 장인과 꾸준하게 좋은 원액을 보관할 수 있는 안정된 환경도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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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익스플로러 / https://coffeexplorer.com/242

 위치도 빼놓을 수 없다. 물이 좋아야 명주가 만들어질 수 있듯이 날이 춥고 습기가 많은 날씨도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오크통 안에서 매년 2%씩 증발하는 ‘엔젤스 쉐어 (Angel’s share)’도 고려하며 인고의 시간을 거쳐야 한 병의 위스키를 얻을 수 있다.

방금 위에서 언급한 ‘엔젤스 쉐어 (Angel’s share)’는 말 그대로 풀어보면 '천사들의 몫'이다. 위스키나 브랜디를 오크통에서 숙성시키는 과정에서 액이 기화돼 약간씩 사라지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과거에는 이 앤젤스 쉐어 말고도 ‘데블스 쉐어 (Devil’s share)’가 문제였다고 한다. 위스키를 만드는 장인들이 허리춤에 병을 들고 다니면서 좋은 위스키들을 슬쩍 슬쩍 마신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글렌피딕은 약 100년 전까지만 해도 증류한 원액을 직원들에게 나눠줬다고 한다. 작은 마을이다 보니 인심이 야박할 수 없는 법. 직원들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도 오며 가며 위스키를 얻어 마시며 다같이 70도가 넘는 위스키 원액을 즐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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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설명이 끝난 후 우리는 4가지 위스키를 시음했다. 12년산과 IPA, 프로젝트 XX, 그리고 FIRE & CANE까지 특별한 위스키가 준비되어 있었다. 위스키도 와인처럼 향을 먼저 맡는 과정이 필요하다. 향을 맡은 후 입으로 가져가 살짝 맛을 본다. 나는 초보자라 그런지 위스키가 모두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FIRE & CANE은 유독 기억에 남았다. 

나는 소독약 냄새에 매우 민감한데 코를 찌르는듯한 소독약 냄새가 강렬하게 났다. 이는 예전에 먹어본 아드벡 위스키가 떠올랐다. 나같은 위스키 초보자가 접하기에는 쉽지 않은 상대였다. 샷으로 먹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워서 내 취향인 하이볼로 마셨다. 앰버서더는 술은 본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먹는 것이 가장 좋다는 말과 함께 물에 타서 먹거나, 얼음과 함께 즐기거나, 탄산수를 포함한 하이볼 등 다양한 방법을 제시해 주었다. 감사하게도 술이 무제한이라 각각의 위스키들로 하이볼을 거의 5잔 넘게 마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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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술을 좋아하는 편이라 술과 관련된 박람회가 있으면 꼭 참석한다. 그 중에서도 내가 매년 찾는 와인 페어는 봄 가을에 호텔에서 주최하는 경우가 많다. 입장료를 내고 여러 부스를 돌아다니면서 조금씩 와인을 시음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런 위스키 클래스는 처음 들어서 약간 참석 전부터 많이 걱정을 했다. ‘위스키가 고가다 보니 수준 높은 사람들이 오지 않을까? 모두 전문가라서 소위 ‘쭈굴이’처럼 있는 거 아닐까’란 걱정을 했다. 

그러나 괜한 걱정이었다. 술이 있는 행사는 시간이 지나면 모두 ‘We are the one’이 되는 건 똑같았다. 처음에는 동행한 사람이랑 조용히 말하는 게 전부였지만, 하나 둘 씩 옆 사람의 잔을 채워주고 관심사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행사가 끝나갈 쯤에는 웃음소리와 박수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술 마시러 간 행사인데 돌아올 때 나는 되려 생각이 많아졌다. 위스키가 인생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성격이 급하고 단기간의 성과를 중시하는 사람이다. 성격이 급한 만큼 술을 마실 때도 원샷, 아니면 빠른 속도로 먹고 취하는 것을 즐겼다. 하지만 위스키는 도수가 높고 빨리 마실 수 있는 술이 아니다. 천천히 음미하며 시간에 따라 변하는 맛을 관찰해야 한다. 

위스키를 보며 서두름보다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인내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빠르게 변하고,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꾸준하게 나아가는 삶의 가치를 고민해보게 되었다. 술은 취하기 위해, 놀기 위해서 과음하는 것 보다 차분하게 시간을 두고 음미하는 것의 매력을 알게 됐다. 게다가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어서 더욱 즐거운 시간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나의 지인들도 모두 참가시키고 싶을 정도로 알찬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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