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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준의 인생극장

대한민국의 공을 독차지하려는 세력들

업적 뭉개고, 과실 따먹고, 권력 자자손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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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 4살 되던 1960년 4.19가 일어났다. 당시 수송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린 학생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진 이야기를 아침 밥상머리에서 들었다.  4살배기라도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났구나하면서 걱정하던 기억이 난다.  
다섯 살 되던, 1961년 5.16은 아주 선명히 기억이 난다. 아침 일찍 일어나시는 할아버지가 켜시는 KBS 라디오를 통해 박종세 아나운서의 음성으로 들었다. 또 주동자인 박정희 소장의 혁명공약 선포도 기억이 난다. 내가 살던 곳은 후암동이었는데 아침에 남산에서 군인들이 혁명 성공 의미에서 하늘에 대고 쏘는 총소리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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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5,16 성공 후 오전 시청 앞에 있는 박정희 장군(왼쪽)

 당시는 국민 다수가 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이었다. 어른들은 군인들의 ‘혁명’을 불가피한 것으로 보았고, ‘그냥 앉아서 당하는 것보다는 젊은 군인들이 뭔가 일을 해서 나라를 바꿔 보는 게 차라리 낫다’는 생각들이었다.

코흘리개 어린 나이에도 변화는 금방 느낄 수 있었다. 나의 놀이터였던 남산 여기저기에 신작로가 나고, 야외음악당이 들어서고 어린이 놀이터가 생기고 얼마 후엔 케이블카란 것이 등장했다. 아침마다 라디오에선 ‘국민 재건체조’가 흘러나와 아침 체조로 하루를 시작했다. 당시 엉망인 교통질서를 잡기 위해 헌병들이 거리에서 무단 횡단하는 사람들을 단속해 새끼줄로 친  격리구역에 세워놓고 ‘창피’를 주곤 했다. 군대 간 삼촌이 휴가 나올 때 건빵과 함께 만화를 갖고 나왔는데 ‘외래품 배격과 국산품 애용’, ‘사치풍조 일소 및 근검절약 생활풍조 배양’, ‘대한민국은 아름다운 금수강산, 잘 가꾸어 자손 대대 넘겨주자’ 등등의 국민계도용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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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베트남한국군 사령관인 채명신 중장(왼쪽)이 군함을 타고 베트남에 도착한 국군들을 환영하고 있다.

 

 
이후 1963년말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장군이 호남에서만 100만표가 넘는 몰표를 더 받으며 민주당 윤보선 후보를 따돌리고 당선된 일, 이후 바로 시작된 한일국교정상화 및  한일청구권자금 요청, 이에 대한 학생들의 반발로 인한 1964년 6.3 계엄 발동, 이어 계속된 비둘기부대, 맹호부대, 청룡부대, 백마부대 등의 베트남 참전, 1966년 경부고속도로 건설 추진, 역시 같은 해 육사출신인 김현옥 서울시장 등이 취임해 강남 개발을 비롯 서울과 수도권을 완전히 뜯어고치는 사업들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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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은 전국 경제개발 현장을 직접 다니며 착공식, 개통식을 주재하기도 했다.

  

6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면 이 세월은 참으로 대단히 감사한 시절이었다. 누구나 겪듯이 나도 개인적으로 힘든 때도 있었고, 국가적으로 시련, 위기들도 있었지만 참으로 잘 극복돼 감사하다. 그리고 지난 60년 동안 어려움은 우리 윗세대나 조상들이 겪었던 외적의 침입과 국난, 지도층의 부패와 타락, 망국, 식민시대, 전쟁, 가난 등에 비해선 아무 것도 아니었다.
힘들었다곤 하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양식과 상식이 있었고 가족?이웃간에 정(情), 신의(信義), 의리(義理)같은 것이 존재했다. 아무리 조선일보, 동아일보에 정부 비판기사가 제대로 못나간다 하더라도 기자도, 공무원도, 정치가도, 심지어 청와대 사람들도 민심을 알았고 무서워할 줄 알았다. 하물며 시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때는 ‘희망’이 있었다. 불가피한 독재가 있지만 이것은 과도기며 나라는, 경제는, 가정은  앞으로 전진했고, 의식주는 늘어나는 시절이었다. 취직도 잘 되었고, 장사도 잘 굴러갔으며, 이 좁은 땅을 벗어나 원양어선, 독일, 베트남, 미국, 중동 등 세계 전역으로 한국인들이 달려 나가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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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그때 한국인들은 성실하고 현명했다. 지도자의 올바른 비전과 계획, 이를 뒷받침하는 테크노크라트를 중심으로 한 인재들의 실행력, 그리고 국민들의 헌신과 노력, 피와 땀 속에서 이뤄진 것이다. 그 과정에 ‘독재’와 ‘부정부패’, ‘비리’도 존재했지만 이는 주류(主流)가 아닌, 지류(支流)였고 인간 사회에 있어 불가피한 것들이기도 했다. 훗날 내가 기자가 되어 우리를 로울 모델로 보고 뛰고 있는 많은 아시아 국가들, 또 우리보다 앞서간 구미 각국들을 지켜보면서 인간과 사회의 발달사는 다 비슷하게 굴러가는 구나를 실감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이념서적이나, 대학가에서 풍미하던 40~60년전 운동권 담론과는 전혀 다른 현실적 인식이었다.
지금은 서울에서 내 집 마련조차 요원하게 된 현실이지만 우리나라는 1960년대부터 국민주택을 건설해 싼값에 장기 저리로 ‘내 집 장만’을 할 수 있었다. 대학 다니던 1977년 당시로선 전혀 생소했던 의료보험제도 실시를 신현확 보건부장관이 발표한 것이 기억난다. 우리나라 산 대부분이 벌거숭이 민둥산이었는데 4월5일을 식목일로 정하고 학생, 군인, 직장인이 총동원돼  산림녹화사업을 범국민적으로 실시했다. 이어 그린벨트 제도가 도입돼 환경보호가 엄격하게 시행되면서 오늘날의 울창한 산림을 가질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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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부산간 고속도로가 개통된 1970년 7월 7일

  

1961년 당시 우리나라 국민소득은 1인당 82달러 정도로 지구상 최후진국 수준. 아프리카 가나와 비슷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라 개조를 위해 돈이 필요했는데 한일협정, 베트남파병, 중동진출, 수출입국 정책, 경쟁력 있는 대기업(재벌) 육성등이 불가피했으며 시의적절하고 현명한 정책의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전 세계가 다시 보는 우리나라의 ‘우수한 코로나  방역 대응’은 이런 수십년 노력과 헌신의 결과다. 우수한 보건의료체계 인프라와 의료 종사자, 전문가, 뒷받침해주는 행정력, 그리고 공통체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국민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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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지난 60년간 세계에서 유래없는 발전을 이뤘다.

 

그런데 이렇게 일군 나라의 모든 공(功)을 독차지 하려는 세력들이 있다. 그들은 정작 이 나라를 세운 주인공들을 ‘나쁜 세력’으로 낙인찍어 몰아내고 있고, 오직 자신들이 젊은 시절 한 행위가 최고이며 이를 자자손손까지 세습시키려고 한다. 이들이 하는 행색을 보면 대한민국이라는 국호, 역사, 국기, 애국가 등 정체성 자체를 부인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것을 우린 그냥 보고만 있어야 할까.
 
아주 오래 전에 읽은 미국 단편 소설이 생각난다. 잘 생기고 언변 좋은, 그러나 근본을 모르는 젊은 부부가 어느 노인 부자가 사는 저택을 방문한다. 그들은 특유의 언변과 친화력으로 노인을 구워삶아 결국 대리인 행세를 하며 그곳에 오래 봉직했던  집사, 하인들 위에 군림한다. 사실상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한다. 결국 노인은 죽고, 그들이 법적으로 주인으로 승계됐다. 그들은 전에 일하던 사람들 다 내쫓고, 그 집을 호텔로 운영하며 부자로 호의호식하며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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